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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Leisure] 신성순의 호젓한 이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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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입부터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길손을 압도한다. 하늘을 찌를 듯한 대나무 숲이 호젓한 오솔길을 뒤덮으며 사시사철 짙푸른 빛을 번뜩인다. 어쩌다 인근 주민들이 찾아올 뿐 바깥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한적한 골짜기조차 빽빽한 대나무 숲(사진)이 점령하고 있으니, 과연 담양은 대나무의 고장이라고 감탄할밖에.

이곳은 전남 담양군 용면 쌍태리 추월산(秋月山) 남서쪽 자락에 다소곳이 숨은 물통골. 골짜기 입구가 물통의 목처럼 비좁은 데다 '신비하고 영험한 약수가 샘솟는다'고 해서 물통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담양군 금성면 비내동의 '대나무골 테마공원'과 달리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대나무 숲이 선사하는 곧은 기개를 가슴속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이름에서부터 요염한 가을달이 연상되는 추월산은 해발 7백26m로 그다지 높지 않으나 층암절벽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산세가 빼어나다. 온통 깎아지른 암벽으로 이루어져 흡사 돌로 쌓은 성인 양 장관을 이루는 데다 동쪽 산자락에는 짙푸른 담양호가 웅크리고 누워 있다. 철을 가리지 않고 등산객과 관광객이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담양호 쪽 얘기일 뿐, 그 반대편에 숨은 이 골짜기는 외지인의 발길을 거부한 채 태고의 자연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전북 순창군 복흥과 담양을 잇는 구절양장의 험준한 고개, 즉 '빛재' 아래가 물통골 입구지만 그 흔한 표지판조차 세워져 있지 않으니 나그네들은 멋모르고 지나칠 수밖에 없으리라.

하늘을 가린 대나무 숲은 시나브로 활엽수에 바통을 넘긴다. 콧노래 절로 나는 호젓한 오솔길을 10여분 헤치다가 경사 급한 비탈길을 5분 남짓 더듬으면 바위틈에서 약수가 샘솟는다. 대나무의 고장답게 바위 속에 대나무 관을 박고 물을 받아 한결 이색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물통골 약수는 신기할 만큼 영험있는 명약이다. 위장병이나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이들이 두서너달쯤 장기 복용하고 깨끗이 나은 사례가 부지기수. 좋은 약이 흔한 요즈음에는 예전만큼 환자들이 찾아오지 않지만 인근 주민들은 여전히 틈나는 대로 물을 길러 온다.

물통골 약수는 약찜물로도 활용되는데 그 과정이 다소 번거롭다. 우선, 계곡에 널린 탄소 성분의 돌을 참나무를 태워 빨갛게 달군 뒤 물통골 약수를 담은 탕에 담근다. 그리고 추월산에서 딴 다래 등의 덩굴나무와 약초.소금을 넣는다. 이렇게 만든 약찜통에 몸을 담그고 두어 시간 찜질하면 신경통.피부병.산후 통증 등이 씻은 듯이 낫는다는 것이다.

물통골 약수 아래 위로는 청정 계곡이 굽이친다. 크고 작은 폭포와 맑디맑은 계류가 청아하기 그지없는 심산유곡이지만 인적은 거의 없다. 흠이라면 가뭄에는 물이 별로 없다는 것. 하지만 추월산 계곡의 모든 물이 바닥나도 물통골 약수만은 마르는 법이 없어 신비함을 더한다.

글.사진=신성순(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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