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Hot TV] 가지마오, 한상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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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찌하면 빨리 수라간 최고 상궁이 될 수 있습니까?"(어린 장금) "물을 떠오너라. …다시 떠오너라."(한상궁) "어찌하여 자꾸 물을 떠오라 하십니까? 따뜻한 물도 안되고, 찬 물도 안되고, 나뭇잎을 띄워와도 안되고…."(어린 장금) "너는 이미 알고 있느니라."(한상궁)

#2. "마마님, 저를 포기하십시오."(미각을 잃은 장금) "나는 네가 필요해!"(한상궁) "마마님께서 저를 딸처럼 여기셔도 이것은 안되는 일입니다. 제가 안쓰럽고 안타까워 그러는 것이라면…."(장금) "닥치거라. 나는 일과 사람을 구별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한상궁)

드라마는 생물 (生物) 이다. 그래서 때때로 PD와 작가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대장금'(MBC) 역시 예외는 아니다. 50회분 드라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6회로 드라마를 떠나야 하는 조연에 불과했던 한상궁이 22회가 끝난 지금도 살아 있으니…. 한상궁의 생명을 10회나 연장시킨 높은 인기에 가장 얼떨떨해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한상궁 본인이다. 의정부 야외촬영장에서 만난 한상궁 역의 탤런트 양미경(42)씨는 "워낙 또래에만 열광하는 젊은 친구들까지 아줌마 연기자의 팬 카페를 만들 정도로 좋아하니 의외"란다.

"방영 초반에 국장님(이병훈 PD)이 인터넷에서 '한상궁 살리기 운동'이 벌어졌다고 전해주셨을 때만 해도 그냥 일시적인 현상이겠지 싶었어요. 장금이를 보호하는 유일한 사람이니 죽으면 장금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뭐 그 정도였죠. 그런데 인기가 하루하루 더해가는 걸 보고 그것만은 아니구나, 그럼 도대체 뭘까 고민하게 됐죠."

양미경이 분석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전폭적인 신뢰다.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갖고, 자라면서 스승을 만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넌 할 수 있다'며 아무 조건 없이 나를 믿어주는 든든한 누군가를 둔 사람은 많지 않다. 바로 이 결핍이 시청자를 자극한 셈이다.

"스승으로서 친부모 이상으로 애정을 갖고 장금을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애들은 저런 사람이 내 부모였으면, 학생들은 저런 사람이 내 스승이었으면, 또 어른들은 내가 바로 저런 사람이었으면 하는 기대감을 싣고 한상궁을 보는 것 같아요. 이렇게 다른 여러 각도에서 켜켜이 보여지는 모습이 공통분모를 형성하면서 한상궁의 인기가 만들어졌다는 게 놀라울 뿐이에요."

사실 한상궁 역은 당초 양미경 몫이 아니었다. 송채환이 맡기로 했다가 갑자기 사정상 번복하는 바람에 다른 연기자들이 모두 대본연습에 들어간 뒤에야 양미경에게 왔다. 생일(7월 25일)에 이PD로부터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식구들과 저녁도 미룬 채 만나 얼결에 맡았단다. 얼핏 생각하면 송채환의 행운을 가로챈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양미경은 이에 동의할까.

양미경은 "좋은 결과(인기) 이전에 연기자로서 주춤하고 있던 순간에 아주 어렵게 한 계단을 올라왔다는 점에서 행운"이라고 말한다.

신인 시절 한 감독이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한 계단을 오르기가 아주 어렵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덧붙인다.

"뒤늦게 배역에 뛰어든 탓도 있지만 원래 중견 연기자가 변신을 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전에 해왔던 대로 내 느낌만 고집했거나 '어차피 16회면 죽을 텐데 대충 하지'라는 마음으로 연기를 했으면 거슬리지 않고 흘러가기는 했겠지만 지금처럼 빛을 발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국장님이 워낙 인물 하나하나에 애정을 갖고 말투부터 감정까지 꼼꼼히 지적해줬기 때문에 한상궁이라는 새 캐릭터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1980년대부터 한 식품회사 전속 CF모델까지 했던 양미경이지만 정작 수라간 상궁 역으로 뜬 지금 이상하게 음식 관련 CF 제의는 없다. 어린 장금이 역의 조정은양과 함께 찍은 두유 광고를 제외하고는 학습지나 건설사 광고 제의가 쏟아지고 있다. 요리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지만 요리사라기보다 스승의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된 때문이다.

그런 한상궁이 현실 속에서는 어떤 철학으로 아이를 가르치는지 문득 궁금했다. 어떤 엄마냐는 질문에 양미경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계모"라고 답했다.

"유치원까지 매를 들 만큼 엄하게 키웠어요. 조카는 무조건 예뻐했지만 외아들 진석(15)은 부족하고 강하게 키웠어요. 그래서인지 아들이 아니라 영감 같아요. 잘 있나 궁금해 전화하면 '엄마 일이나 잘 해'그런다니까요."

괜한 말이 아니라 아들 진석은 초등학교 6년을 학습지 하나로 보냈다. 그나마 엄마 말을 좀 안 들으면 "학습지 끊어버린다"는 협박(?)을 받기 일쑤였다. 그런 진석이가 중학교에 들어가 과외 선생을 스스로 모셔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한상궁이나, 양미경이나 넘치는 세상에 부족함의 미덕이 뭔지 보여주는 인물인 것 같다.

의정부=안혜리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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