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죄악 씻어낸다”피흘릴때까지 구타/관련자 6명이 폭로한 오대양생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박 교주와 함께 천국간다”/신도들 같이 있으려 다퉈/“정욕은 죄의 근원” 부부관계 엄금/신혼부부도 5년동안 떨어져 살아/월 3푼 고리… 대전부자들 사채 현혹
4년만에 느닷없는 집단자수로 오대양의혹을 「부활」시킨 4명 살해·암매장사건과 관련,검찰의 조사를 받았던 오대양 관련자 6명이 31일 집단으로 중앙일보 기자와 만나 사건경위·오대양생활 등을 털어놓았다. 이들은 집단변사사건 현장에 있었던 김영자씨(45),살해된 후 암매장된 노순호씨(당시 32세·오대양 총무과장)부인 박명자씨(35),무용강사 자리를 팽개치고 오대양에 몰두했던 정화진씨(45),암매장 혐의로 구속된 김도현씨(38·당시 오대양 관리부차장)의 부인 유연숙씨(34),구속된 문윤중씨(38·오대양 생산과장)부인 강수자씨(38)와 이들의 자수를 권유했다는 이재문씨(43) 등이다. 이들은 31일에도 한결같이 집단자수동기가 「양심의 가책」때문이며 오대양사채의 (주)세모 유입부분은 모른다고 주장,의문점을 남겼으나 오대양생활을 상세히 밝히고 교주였던 박순자씨를 비난해 주목을 끌고 있다. 이들이 밝힌 내용을 간추려본다.<편집자주>
▷자수동기◁
오대양사건 직후 전남 고흥에 사는 김도현씨의 외사촌형이 동서인 이재문씨에게 전화를 걸어 『반석이 엄마(유연숙씨)아 애들 둘이 서울 안국동 중원식당에 피신해 있으니 찾아내 구해달라』고 했다.
이씨가 수소문끝에 이들을 찾아내 한달정도 자신의 집에 기거시키며유씨를 음식점에 취직시켜 주는등 뒷수습을 해준 것이 이씨와 이들이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그뒤 채권자 이상배씨 폭행사건으로 구속됐던 김도현씨가 출감후 인사차 이씨를 찾아와 서로 내왕이 있었으며 이씨는 김씨를 통해 이들이 아직 청계천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것을 알게 됐다. 이씨는 『오대양식 생활은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설득,김씨가 심경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씨는 이후 김씨의 소개로 찾아온 이세윤씨(45·구속)를 친구를 통해 K운수 택시기사로 취직을 알선해주었으며 계속 김씨의 소개로 한호재(38·구속)·김강규(31·구속)·오민철(34·구속)씨 등을 알게 되었다.
○아들낳고 동요
91년 2월 김도현씨가 이씨의 집으로 찾아와 『말못할 고민이 있는데 털어놓고 싶다』며 『노씨등을 때려죽인 뒤 파묻었다』고 털어놓았다. 김씨는 『자수하고 싶지만 혼자가서 발설하면 나머지는 전부 현행범이 되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오민철씨가 마지막까지 완강히 버텨 설득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씨는 수유동·거여동의 집단생활당시 실질적인 지도자로 오대양의 세뇌에서 가장 늦게 깨어난 인물이었다.
이씨는 오씨의 부인 심해연씨(25)가 아들을 낳은 5월 중순께 『부부관계가 금지된 오대양식 규율을 결국 어기게 되지 않았느냐』고 집중추궁,집단생활이 깨어짐은 물론 오씨도 세뇌에서 서서히 깨어났다.
이들은 모두 자수모임에 세모의 손영록 부사장이 참석,신앙간증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그동안 박순자에게 철저히 속아왔음을 차츰 깨달으며 이씨의 끈질긴 설득으로 죄값을 치르고 떳떳이 살자고 결심,주사한 것』이라고 밝혔다.
▷오대양사건◁
이들은 『32명은 자살한 것이 틀림없으며 자살의 직접적 동기는 채권자폭행으로 경찰에 연행·구속된 직원들에 의해 4명의 살해·암매장사건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한 박씨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씨등은 이같은 증거로 ▲직원들의 연행이후 박순자씨가 『수사반장(TV드라마)을 보면 가슴이 떨려서 못보겠다』고 두차례나 말했던 점 ▲당시 오대양에서의 모든 행동의 근거를 성경의 부분을 따 자신있게 설명해왔던 박씨가 사건이후 노순호씨 등의 살해를 합리화하기 위해 인용한 성경구절을 주위직원들에게 수차례나 반복해 강조하는등 불안증세를 보여왔던 점 등을 들었다.
현장에서 목격된 초록색 봉고차의 내왕은 29일 오전 1시쯤 이기정씨와 처남 박용준·박용주씨 등이 찾아와 『박순자를 찾아내놓으라』며 김영자·유·정화진씨를 함께 벽에 세워놓고 박용주씨가 기타로 마구 때려 머리에 피를 흘리며 실신한 정씨를 읍내 성심병원으로 태워갔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대최후 학습
김영자씨는 『박씨등이 천장으로 올라간 이틀뒤인 27일 저녁부터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으며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와 서로 승강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렸었다』며 『아마도 27일부터 서로 교살을 시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밝혔다.
이들은 타살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 이경수씨가 목을 맨 줄의 정교함에 대해서는 『이씨가 농부출신으로 평소 매듭은 물론 새끼꼬기등에 가장 능했으며 아마 자신이 직접 만들었던 것 같다』고 밝혔으며 정액검출문제에 대해서는 『교살시 흘러나온 분비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사건현장을 최초로 목격했던 김영자씨는 『천장에서 발견된 「반대다. 완전도전이다. 넘기면 개발비 불게하는 거다」라는 내용의 메모는 「내려가는데 반대다. 감히 내게 그런 요구를 한다는 것은 완전 도전이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한편 천장에서 발견된 「박용주 다녀갔음. 삼우도 고통받고 있다함」의 메모에 대해서는 정화진씨는 『당시 마당에서 만난 용주씨가 「그 사람들 어디있느냐,삼우도 고통받고 있다. 빨리 찾아내라」고 해 그 사실을 내용도 모른채 메모쪽지로 전달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모두 『박순자씨가 자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절대적이며 유대인이 언덕으로 쫓겨가 동맥을 끊고 모두 자살했다는 「마사다의 최후」등을 공부했던 점으로 미뤄 박씨가 그 성경내용을 인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대양 생활 및 사채모집◁
집단변사사건 당시에도 박순자씨와 함께 천국에 가기 위해 사건현장인 용인공장 천장에 서로 올라가려고 하는 바람에 박순자씨가 대전지역에서 사채를 끌어들인 사람들만 올라가도록 지시했을 정도였다.
또 이들은 오대양사람들이 구원파신도라는 소문은 전혀 근거없는 낭설이며 오히려 박순자씨는 걸핏하면 「삼각지 마귀」「삼각지 귀신」운운하며 구원파의 본산으로 알려진 삼각지교회와 권신찬 목사를 헐뜯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신앙생활은 다같이 성경을 펴놓고 공부하는 식이 아니라 박순자씨 혼자만 성경을 보며 그때그때 생긴 일이나 할 일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했다. 예컨대 차입금(사채)모집을 종용할때면 『누런 이삭(돈)이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추수(차입)를 해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대양에 들어간 뒤 박순자씨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하도록 「욕교제」「매교제」 등을 통해 자신의 자존심을 스스로 짓밟는 훈련을 받았다. 이는 오대양생활을 청산한 뒤 서울 청계천·수유리·거여동 등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됐다.
욕교제·매교제는 마음속의 죄악을 씻어내야 참된 삶을 살 수 있다며 규율을 어길 경우 상스러운 욕을 하게 하거나 때리게 하는 것. 이렇게 함으로써 배운 사람이든 지체높은 가문의 사람이든 박순자씨 앞에서 「고상한 척」조차 못하게 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매교체의 경우 손버릇이 나빠 걸린 사람은 손을,말을 잘못한 사람은 입을 집중 난타당하는데 온갖 죄악이 사물을 잘못본데서 연유한다하여 눈부위는 매교제때마다 얻어 맞았다. 또 피는 곧 「죄덩어리」라 하여 피가 흐를 때까지 때렸다.
○남자숙소 우회
강수자씨는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퉁퉁 붓도록 얻어맞고도 피가 안나와 유연숙씨가 코를 때려 억지로 피를 흘리게 하기도 했다.
박순자씨는 특히 「정욕」을 죄악의 근원이라며 남녀관계·부부관계를 철저히 통제해 김도현·유연숙 부부는 오대양생활 5년동안 초기 1개월을 빼놓고는 단 한번도 부부관계를 갖지 못했다. 심지어 잠꼬대를 하면서 남편이름을 부르거나 신음소리만 내도 음탕한 정욕을 씻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얻어 맞았다.
남자숙소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기 때문에 남자숙소 뒤편에 있는 밭에 일하러 가는데도 산길을 타고 돌아가야 했다. 정욕을 억제하기 위해 마늘·파·부추·돼지고기도 못먹게 했으며 밭일도중에 뱀이 나오면 그 근처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 정욕이 남아있기 때문이라 하여 매교제를 당했다.
가족을 갈라놓는 교육 또한 철저해 유씨의 아들은 집단변사사건후 서울에서 살때도 한동안 유씨를 「원예과 아줌마」로 부를 정도였다.
이들은 욕과 매를 통해 정욕을 씻어내는 작업과 아울러 추수(사채거두기)에 내몰렸다. 박순자씨가 늘 『정욕이 해결되면 돈은 자연히 모이는 것』이라고 강조해 이들은 정욕이 남아 있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물불 안가리고 추수에 나서야 했다.
사채모집대상은 우선 친정을 비롯한 친지·친구들이었다.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수법은 자신의 못된 과거를 억지로 꾸며대는 것.
『처녀적에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졌는데 들켜 이혼당할 지경이다』『외간남자와 문란한 성관계를 가지다 매독에 걸렸다』는 등의 거짓말을 한 뒤 이를 해결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식이었다.
이렇게 해 일가·친척·친구들이 더이상 꿔줄 돈이 없게 되면 길가는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돈을 달라고 달려들 정도로 앞뒤분간을 못하게 되기도 했다.
뭐니뭐니해도 대전지역의 부자들이 가장 큰 물주였으며 손님을 모셔와 오대양을 견학시키고 난 뒤 참된 삶·사업 등에 관한 박순자씨의 일장연설을 듣고나면 대부분 사채를 내놓았다.
○막판 빚에 허덕
특히 오대양에 돈을 꿔주면 월 3푼이상의 고리를 주고 날짜를 어기지 않는다고 소문이 나 제손으로 이삭을 싸들고 오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개중에는 다른데서 2푼짜리 빚을 내 오대양에 3∼4푼으로 꿔준 뒤 그 차액을 챙기는 얌체물주도 많았다.
이들은 그러나 오대양으로 흘러든 사채의 액수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고 했다. 워낙 호화판생활을 한데다 미리 얻어쓴 사채를 막기 바빴기 때문에 송재화씨 같은 사람에게 보낼 돈이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들은 또 사채내용이 적힌 「법궤」라는 비밀장부를 박순자씨만 관리했으며 그나마 집단변사사건 직전 소각된 것으로 알려져 일부 채권자중에는 채권액을 제멋대로 불린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문점◁
이들은 모두 『송재화씨를 전혀 본적도 없으며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오대양경리였던 이복희씨(30)가 오대양내에서 송여인을 몇차례 보았다는 말과는 달라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이들중 박명자씨만이 『구원파교회에 1년여 나갔었다』고 주장할뿐 구원파교회에 나가거나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 자수자는 물론 오대양직원 대부분이 구원파였다는 검찰측 주장과 상이점을 드러내 이들이 아직도 결정적 부분에는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의문점을 남겼다.<최훈·정태수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