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판 '위기의 주부들'] ③ 온라인 제비족을 조심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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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불륜 신드롬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인류 역사와 맞먹는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 기혼여성의 ‘애인 만들기’ 신드롬은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 위험한 현장을 全추적한다.



인터넷 제비족의 존재가 주부 성 일탈을 조장하는 주범으로 등장한 지는 오래다. 인터넷 제비족은 ‘귀족 백수’로 통하는 파렴치한이다. 일정한 수입 없이 하루 종일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먹잇감을 찾는다. 오프라인 만남에서는 유창한 화술을 자랑하며 수입이 괜찮은 자유직업 종사자로 신분을 위장한다. 이들의 서식지는 사이버 공간이며 채팅 사이트가 주활동무대다.

이들은 주로 남편과의 결혼생활, 일상생활의 무료함, 목표를 상실한 인생을 푸념하는 주부들을 사냥감으로 선정한다. 이들이 노리는 대상은 돈 많고 시간 많은 30∼40대 주부들이다. 인물과 몸매가 좋으면 금상첨화다. 이들은 여성들을 음식에 비유해 분류하기도 한다. 가정주부는 ‘특식’, 미혼여성은 ‘부식’, 독신녀는 ‘별식’으로 규정한다. 인터넷 제비족이 가장 선호하는 그룹은 ‘특식’으로 분류하는 가정주부다. 가정주부 중에서도 돈이 많은 유한부인들을 ‘스페셜 플러스’로 명명한다.

인터넷 제비족들은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고 채팅 때 구사하는 대화도 감각적이다. ‘진실함’을 가장하며 주부들의 온갖 불평과 푸념을 ‘경청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싸구려 인생철학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대부분 깊은 동정심과 함께 아슬아슬한 ‘성 담론’으로 채팅에 빠진 주부들의 혼을 빼놓는다.

주부들은 처음에는 감각적 언어 구사에 매료되며, 돈 많은 사업가의 냄새를 풍기는 제비족에게 깊숙이 경도된다. 돈 많은 사업가는 향락을 위한 비용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무엇보다 몸을 담보로 사기당할 우려가 없다는 점에서 선호의 대상이다. 그것이 부메랑이 돼 자신을 파멸로 이끌 것임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상대라는 점에 안심하게 된다.

2004년부터 약 2년간 채팅 사이트를 통해 만난 10여 명의 주부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오명수(가명·37) 씨는 “온라인에서의 만남이 오프라인으로 발전할 경우, 성공률은 80% 이상이었다”고 고백했다. 온라인에서 대화를 즐기더라도 “절대 직접 만나는 일은 피하라”는 것이 오씨의 충고 아닌 충고다. 적당한 양의 음주 후 노래방까지만 ‘진출’하면 작전은 늘 성공했다는 것이 오씨의 경험담이다.

오씨는 수백만 원씩의 사전 자금을 늘 준비했다. 저녁식사를 겸한 첫 만남에서는 절대로 ‘마각’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 오씨의 철칙이었다. 상당한 재력이 있는 것으로 판명된 여인들과는 5∼6차례 만남을 지속할 때까지 육체관계를 요구하지 않았다. 몸이 달아오른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나올 때도 ‘사양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포인트다. 그런 자세를 견지하느냐 못하느냐가 프로와 아마의 차이라는 것이 오씨의 지론이다.

일단 관계를 맺고 난 후에는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다. ‘수금 단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터넷 제비족들이 돈을 요구하는 유형은 다양하다. 불륜을 미끼로 거액부터 잔돈푼까지 철저하게 뜯어내는 ‘철면피형’, 돈을 빌려 갚지 않는 ‘사기형’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가장 악질적인 ‘갈취형’도 있다.

사기형 제비족은 몇 차례 돈 관계에서는 철저하게 신용을 지킨다. 이자까지 계산해 돈을 갚아 ‘칼 같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얻는다. 그러고는 결정적 순간에 수천만 원 단위의 ‘사업자금’을 빌린 후 종적을 감춘다.

갈취형 제비족들은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로 여성을 유혹해 이혼을 유도하고, 여인들의 이혼 후 재산이나 위자료를 빼앗는다. 심지어 매춘을 강요하거나 폭력을 일삼는 폭력배 출신 제비족도 있다. 이렇게 축적한 자금은 또 다른 먹잇감을 찾기 위한 재원으로 활용한다.

인터넷 제비족을 피해 가는 방법은 3가지다. ▷채팅 중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말 것 ▷이야기를 주고받더라도 자신의 처지에 대한 글은 삼갈 것 ▷사업가라고 소개하면 일단 의심할 것 등이다. 오씨의 충고대로 절대로 오프라인 만남에 나가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자의 취재에 응한 오씨는 2005년 말 이 ‘한심한 짓’을 그만뒀다. 분당에 거주하는 한 주부와 만남을 유지하다 큰 낭패를 봤기 때문이다. 이 여인의 남편은 강남 유흥주점의 사장이었는데 부인의 불륜 사실을 안 남편이 폭력배를 동원해 자신을 압박했다는 것이다. “손과 발이 잘릴 뻔한 위기를 겪었다”는 것이 오씨의 고백이다.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 인기 비결

“중년 여성들 꽉 막힌 ‘욕망’의 대리 배출구?”

2005년 7월부터 공중파를 탄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은 국내에서도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드라마 앞에 붙은 수사는 현란하다. 로라 부시가 백악관 만찬에서 기자들을 향해 자신 또한 위기의 주부라고 웅변한 드라마, 오프라 윈프리가 너무 좋아해 촬영 세트장까지 방문한 드라마, 드라마 타깃은 여성이라는 고정관념을 과감히 탈피해 남성들까지 주 시청자로 끌어들인 드라마, 주인공 브리가 별거 중인 남편을 유혹하려고 입은 300달러짜리 브래지어·팬티 세트를 동나게 한 드라마 등….

이 드라마는 약 3,000만 명의 ‘DH(원제 ‘Desperate Housewives’의 약자)폐인’까지 양산한 미국 ABC 방송국 인기 시리즈다. 그 위력은 태평양 건너 한국의 시청자들에게도 폭발적 반응을 몰고 왔다.

19세 이상 시청 가능, 일요일 밤 11시15분, 12시 심야 방송이라는 편성의 취약점에도 <위기의 주부들>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당시 네이버를 비롯한 각종 블로그에는 <위기의 주부들> 팬 카페가 개설됐으며, 방영 시간이 겹친 MBC의 고정 팬들은 이 매혹적이고 위태로운 주부들의 이야기를 두고 갈팡질팡 진퇴양난에 빠졌다.

1시즌 최종회를 앞둔 상태에서 이 드라마는 적게는 5.5%, 많게는 7.4%의 시청률을 올리며 평균시청률 3%대로 시청률 고전을 면치 못했던 외화 시리즈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공중파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9월5일 케이블 TV 캐치온에 이어 <위기의 주부들>의 방송을 시작한 OCN은 평균시청률 1.23%, 공중파 시청률로 환산하자면 10%를 훌쩍 뛰어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미국 어느 도시의 교외에 사는 네 주부가 동네 주부의 살인사건을 풀어나가는 미스터리풍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는 일반 드라마의 상식을 과감히 탈피한 기이한 형식이 그대로 배어 있다. 방송 첫 회, <위기의 주부들>은 소프오페라의 일반적 스토리를 배반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안겨 줬다.

중산층 마을 위스페리아에 사는 주부 메리 앨리스 영(브렌다 스트롱). 화사한 아침, 가족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정겨운 풍경. 그런데 집안일을 하던 주부의 모습에 이어 잠시 후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다. 메리 앨리스가 붙박이장을 열고 권총을 꺼내 자신의 머리를 쏜 것이다. 그 순간 <위기의 주부들>은 단순한 소프오페라의 틀을 넘어 미스터리와 코미디, 멜로가 접목된 희한한 드라마로 탈바꿈한다. 그리고는 각종 장르의 특징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위기의 주부들>은 주인공들의 일반적인 주부상에 반하는 갖가지 비도덕적 행동으로 미국 방영 때도 각종 종교·윤리단체로부터 저속한 드라마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KBS 더빙판의 경우 욕설을 약간 순화한 정도를 제외하고는 삭제 장면 하나 없이 그대로 방송됐음에도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즐겼다.

‘파격적인 그들의 행동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이해할 수 없다’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일부에 불과했다. 일반적 드라마의 구조를 넘어 긴장감 있는 스토리가 결합한 <위기의 주부들>은 ‘새롭다’ ‘신선하다’ ‘파격적이다’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곧장 화제를 모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흥분은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학교·직장은 물론 각종 모임에서도 <위기의 주부들>의 네 주부의 생활이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위스페리아는 더 이상 먼 곳이 아닌 내 주변, 서울 한복판의 이야기가 됐다.

새파란 젊은이와 바람을 피우는 가브리엘은 주부들의 공상을 대신 펼쳐 주었고, 매사 완벽을 추구하는 브리의 성격을 ‘쿨’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생겼다. 남자 없이는 못 사는 이혼녀 수전의 철없는 행동은 웃음을 유발했으며, 네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 리네트의 처지는 동정을 부를 만큼 절실했다. 극 전체에 화자로 등장하는 메리 앨리스의 내레이션은 이 드라마가 단순히 주부들이 즐겨 보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님을 매순간 상기시켜 준다.

네 명의 메인 캐릭터를 관통하는 불행의 기운은 바로 권총 자살을 한 메리 앨리스의 영혼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가 완전했던 가정을 저버린 것처럼 네 주인공 역시 현실에 대한 불안을 감지하는 것이다.

결혼생활의 갖은 관습들에서 탈피해 자유로운 삶을 위해 일탈을 감행하는 가브리엘, 티끌 하나 없는 완벽한 가정생활을 원하지만 정작 남편의 외도와 자식의 탈선으로 곤란을 겪는 브리, 한때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지금은 아이들에 치여 삶의 의미를 생각할 여유조차 찾아볼 수 없는 리네트, 바람을 피운 전 남편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으로 완벽한 남자를 꿈꾸는 수전은 모두 크게 다르지 않다.

‘주부’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네 명의 캐릭터,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이들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주부가 겪는 결혼과 인생, 사랑의 고민을 고스란히 대변해 준다.

한기홍 월간중앙 객원기자[glutton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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