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에리히 프롬 저 소유냐 존재냐|사회 병인 분석 처방 제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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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느 한 시대를 진단하고 그 시대가 병들었음을 확인하여 그에 알맞은 치료책을 제시하려면 우선 역사를 두루 살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능력과 겉으로는 건강하게 보이는 한 시대의 배후에 은밀하게 숨겨진 법을 알아 채 그 법의 원인을 밝히고 그에 알맞은 처방전을 내놓을 수 있는 종합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또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랑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필수적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190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심리학·정신분석학·철학 등을 공부하고, 1934년 나치를 피해 미국에 정착한 이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의 영향 아래「현대인에 있어서 자유의 의미」를 추구하다 1980년 타계하였다.
『자유로부터의 도피』『건전한 사회』『희망의 혁명』등의 저술에서 이미 사회의 병을 진단하고 역사의 이성적 방향을 모색하였던 그는『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자신이 평생을 기울였던 작업에 결론을 내렸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는 현대 사회의 성격을 분석하는 기본적인 범주를 간명하게 소유의 양식과 존재의 양식으로 삼았다. 이러한 분석의 기본 틀이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그것이 이 사회를 움직이는 사회적인 요인과 개인적인 요인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틀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 분석 범주는 현대사회의 성격분석에 가장 효과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러한 점들은 그가 이 범주를 실증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대상들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제1장에서 그는 이미 우리에게 그 차이가 망각되어버린 듯한 소유와 존재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해주는 작업을 한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일상사, 즉 대화나 배움이나 독서 또는 기억에서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 버리는 이 두 양식의 차이가 극명하게 대조되어 제시된다.
그의 이러한 날카로운 시각은 우리들이 반성 없이 사용하는 언어의 사용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우리가 얼마나 소유 지향적인 삶 속에 빠져 있는가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구약이나 신약성서에 나타난 이 두 가지 양식은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도 제시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프롬은 우리의 무반성적이고 타성적인 삶에 통렬한 충격을 가한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제2장에서 이 두 가지 존재 양식의 차이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을 통해 심화된다. 소유양식의 본질을 사유재산의 본질에서 찾은 프롬은 사유재산을 의미하는 영어가 원래「약탈하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인류의 전 역사에서 이러한 사유재산제도가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이 소유 양식은 가부장적인 남성우위의 제도로서「새것이 아름답다」는 소비 지향적인 사회로, 심지어「내가 앓고 있는」것이 아니라「내가내 범을 소유하게 된」사태에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모든「동사」를「명사」로 바꾸어, 곧 모든 것을 물화 시켜 소유하고 그 소유의 양에 의해 한 개인이 정의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이와 대비되는 존재의 양식은 독립성·자유·비판적 이성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능동성이며,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하는 위면의 세계가 아니라 실존의 세계다.
프롬은 소유양식이 인간본성에 깊이 뿌리 박고 있으며 이는 사실상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도전한다. 그는 단체 행동에 관한 자신의 관찰에 근거하여, 소유양식이나 존재양식의 어느 한쪽에 전적으로 속하여 변화시킬 수 없는 극단적인 경우란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의 경우에는 양쪽이 공존할 수 있으며 어느 폭이 우세하게 되느냐는 단지 환경적인 요소에 좌우될 뿐이라고 한다.
나아가 그는 존재의 양식에서는 나누어주고 회생하려는 욕망의 높은 강도와 빈도가 결코 놀라운 것이 아니며 산업사회에서 이러한 욕구를 가진 사람이 예외가 된 상황이 오히려 놀랍다고 진단한다.
현대사회는 한 약속을 유산으로 가지고 있다. 프롬이 지적한대로 자연을 지배하여 물질적인 끝없는 향유가 가능하며,「개인적」자유가 보장되리라는 약속이 그것으로서 그 약속은 산업시대가 시작된 이후에 시대를 지탱하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무한정한 욕망의 성취가 행복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는 인식과 우리의 삶은 독립적이라는 꿈이 실상은 허위의식이며 인간은 한갓 기계장치의 한 톱니바퀴 물과 하다는 자각,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의 극단화, 그리고 기술적 발전이 환경의 파괴를 불러와 마침내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죽음을 가져온다는 위기감에 의해 그 약속은 환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 환상의 깨달음은 절망으로 이어지거나 환상을 환상으로 자기를 거부하고 마약 환자가 마약을 찾듯 그에 몰두하는 병적인 자기방어로 이어진다. 프롬의 작업은 이 시대적 병인을 소유의 양식에서 찾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의 제 3장에서 프롬은 인류가 겪는 모는 겪을 대 재난을, 인간의 성격과 사회의 구조를 소유의 양식에서 존재의 양식으로 변화시킴으로써 피할 수 있다는 확신 아래 새로운 인간상과 새로운 사회를 묘사한다.
그는 불타의「네 가지 진리」에 비교해 네 가지 조건, 즉 우리는 고통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알고, 또 그 불행은 극복할 수 있음을 인정하여 이를 위하여 현재의 습관을 변경하고 일정한 생활규범을 따를 것을 다짐하는 등 이 네 가지 조건들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성격은 변화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아가 새로운 인간이 가져야할 특징들을 제시하고 있거니와 그 핵심적인 요체는 완전하게 존재하기 위해 모든 형태의 소유를 포기할 것과 자기 주위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사랑, 그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요구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되는 것을 정계하고 현실의 존중을 강조한다.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중요한 것은 그 가능성의 어려움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그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다.
그리고『새로운 사회상은 소외되지 않은 존재 지향의 개인의 요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롬은 이러한 목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건전한 소비」를 위한 생산의 감독, 모든 사람들의 경제적·정치적 참여,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 이를 위한 탈 집중화, 관료제적 경영의 인도주의적 경영으로의 변환 등 여러 요건을 필요로 함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프롬은 후기중세의 문화가「신의 나라」라는 이상을 따랐기 때문에 번영했고, 현대사회는「진보하는 지상의 나라」의 성장이라는 이상이 갖는 활력에서 번영하였으나, 금세기에 들어서 이상은「바벨탑」의 이상으로 타락, 몰락을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나아가 신의나라와 지상의 나라가「정」과「반」이라면「존재의 나라」라는「종합」만이 이 시대의 유일한 대안임을 확언한다.
프롬의 분석과 전망이 완벽한 것은 물론 아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개인적인 성격에 보다 강조 점을 두어 잘못하면 개인적인 도덕에 흐를 위험이 없지 않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오늘 우리가 겪고있는 역사와 새로운 사회에 대한 혼란의 시기에, 또 이를 헤쳐가려는 사람들에게 프롬의 대안은 다시금 숙고해야 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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