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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총장|한때 시국 따라 부침…「총장 중의 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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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국립 서울대학교의 초대 총장은 법학 박사인 미군 해리B 앤스테드 대위였다.
당시 임명권은 미군정 장관에게 있었던 만큼 당연한 인사였다.
그러나 한국 지성의 요람인 서울대의 초대 수장이 미군이었다는 사실은 좋든 싫든 서울대가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각양의 해석을 가능케 한다.
86년 2월 26일의 서울대 졸업식은 시대의 아픔이 개인으로서, 학자로서, 공인으로서의 그것과 함께 드러나 대조를 보인 그런 자리였다.
17대 박봉식 총장이 단에 오르는 순간 사각모의 졸업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린 채 『아침이슬』을 부르기 시작했다.
졸업생들은 노래를 마친 뒤 야유를 보내며 식장을 빠져나갔다.

<초대는 미군대위>
3천여 명 중 식장에 남아 자리를 지킨 졸업생 등 참석자는 5백여명에 불과했다.
박 총장은 끝까지 졸업사를 마치 뒤 식단을 내려섰으나 당시 그가 겪어야 했던 수모는 6·10 운동과 6·29 선언으로 이어지는 거센 파도의 전조였다.
87년 8월 박 총장은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2년 1개월만에 물러났다.
이렇듯 서울대 총장이라는 자리는 지성의 최고봉이라는 영광과 함께 간판 대학으로서 「시국을 반영하는 거물」의 성격을 띠어왔다.
현재 18대 조완규 총장에 이르기까지 크든 작든 서울대 총장은 수난을 피할 수 없었다.
초대 앤스테드 총장이 1년 2개월만에 물러난 뒤 최초의 한국인 총장으로 취임한 이춘호 박사는 재임 7개월만에 「국대안」 파동으로 물러나 최단명 총장으로 기록됐다.
국대안 파동은 경성의전·수원농전 등 기존의 대학을 통합, 서울대를 설립하려는 미군정의 추진을 대상 학교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 서울대 설립 후에도 국대안 「여진」이 계속돼 동맹 휴업·좌우사상 논쟁으로 번져갔다. 이 파동으로 물러난 이 총장은 6·25때 납북돼 행방불명됐다.
3대 장리욱 총장은 정부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장 총장은 학생 데모 처리 문제를 놓고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했고 문교부 측의 사퇴 권고를 무시할 만큼 「반골형」 총장이었다.
그러나 결국 8개월만에 자리를 최규동 박사에게 물려줬다.
최 총장 재임기간 중 6·25가 터지면서 서울에 남아 있던 인민군에 의해 납북돼 평양 교도소에서 옥사, 1년 10개월만에 임기를 마쳤다.
그러나 최 총장은 짧은 재임기간에도 기구개편·학칙개편 등을 통해 「서울대의 기틀」을 마련한 총장으로 평가된다.

<정부에 소신 안 굽혀>
전쟁의 포화 속 부산연합대학 가건물에서 5대 최규남 박사가 취임했다.
최 총장은 최초로 4년 임기를 무사히 마친 총장으로 「대학의 자치」를 위해 노력했다.
『학문의 독립은 대학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의미합니다』로 시작하는 최 총장의 53년 입학식사는 명문으로 꼽힌다.
최 총장 재임기간 중 교내에 평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대학의 자율성 확보를 위한 기반이 마련됐다.
6대 윤일선 총장은 전임 최 총장 시절 마련한 「총·학장 임명시 교수들이 신임 투표로 동의권을 행사한다」는 규정에 따라 교수들의 투표권 행사라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임명됐다.
민의가 반영된 총장인 만큼 재임 기간도 5년 2개월로 역대 총장 중 가장 길었다.
윤 총장 재임중인 60년 교수협의회가 결성돼 학내 민주화가 더욱 진전됐다.
그리나 5·16으로 대학은 다시 신음하기 시작했다.
7대 권중휘 총장은 「군사 독재 반대」 「한일 협정 반대」를 외치는 학생들의 데모 때문에 도중 하차했고 역대 총장 중 가장 「강골」로 소문난 신태환 박사가 취임했다.
『대학 교수도 직업으로서의 가치로 볼 때 다른 직업과 다름없다. 교수도 구래의 자존심을 버리고 직업적 의지를 견지해야 한다. 교수노동조합과 같은 교수협의회를 결성해야 한다.』
56년 평 교수 시절 대학신문에 발표한 신 총장의 교수협의회 제안문은 교수직을 직업 측면에서 파악한 명문으로 꼽힌다.
신 총장은 취임직후부터 박 대통령 및 당시 윤천주 문교부 장관과 잦은 의견 충돌을 빚다 1년 2개월만에 「6·3 사태」 관련 학생 처벌 문제로 사표를 냈다.
『교수와 학생의 목을 자르면서까지 총장 자리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사임 이유였다.
신 총장 사임 이후 「쌍권총의 사나이」로 불리던 유기천 총장이 취임했다.
유 총장의 별명은 66년 10월 서울 동대문 경찰서에 호신용으로 6연발 권총 휴대 허가를 신청한데서 비롯됐다.
한일관계 정상화 등의 문제로 사회가 극도의 혼란 상태로 빠시면서 총장 앞으로 협박장이 날아드는 등 신변의 위험을 느낀 유총장이 호신용 권총을 요구했고 이것이 세간에 『유 총장은 쌍권총을 차고 다닌다』는 소문으로 퍼졌다.
미 예일대 법학 박사 출신인 유총장은 학생들의 퇴임요구 등 학내 소요로 1년 3개월만에 물러나야 했다.
제 10대 최문환 총장 시절 서울대는 명실상부한 현대적 의미의 종합대학으로 발돋움했다. 서울대 종합화 10개년 계획이 수립돼 학교 모습이 새롭게 바뀌기 시작했다.
최 총장은 학생들과의 관계도 원만해 비교적 조용하게 대학을 이끌었으나 4년 임기를 4개월 앞두고 뇌출혈로 사망, 한심석 총장이 11대로 취임했다.
한 총장은 최초의 서울대 출신(38년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으로 유일한 연임(11, 12대) 총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화려한 기록과는 달리 유신정권의 출범 등 경직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영욕의 재임 기간」을 보내야 했다.

<타대 출신 첫 발탁>
75년 관악 캠퍼스로 이전할 당시 학생들은 『데모를 막기 위해 여러 곳에 분산돼 있는 단 과대를 도심에서 떨어진 산 구석에 몰아 넣으려 하고 있다』며 캠퍼스 종합화 방안을 맹렬히 비난했다.
결국 한 총장은 긴급조치 9호 반대 데모의 후유증으로 사표를 내야했다.
윤천주 총장은 「서울대 교수 출신이 아닌 유일한 총장」으로 부산대 총장에서 한 총장 후임으로 발탁됐다. 윤 총장은 원만한 일 처리로 4년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14대 고병익 박사는 10·26 사태로 신 군부가 출현하면서 별다른 이유 없이 1년 2개월로 임기를 끝냈다.
5공 출범과 함께 총장이 된 권이혁 총장은 3년 3개월 동안 재직하다 문교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권 총장 시절에도 격렬한 학내 분규가 계속돼 그는 이임사에서 『재임기간 중 매일 비나 왔으면 하고 바랐다』며 5공 시절 총장의 어려움을 피력했다.
권 총장은 그후 보사부 장관을 거쳐 현 환경처장관으로 발탁, 「4관 박사」(총장을 장관급으로 포함)가 됐다.
후임인 이현재 총장도 1년 9개월만에 사표를 제출했다.
이 총장이 「삼민투」사건에 연루된 서울대생 7명을 제명 처분하라는 외압을 버텨 총장직을 내놓아야 했고 그 인연으로 6공 초대재상으로 발탁됐다.
박봉식 총장에 이어 제 18대 총장에 오른 조완규 박사는 원만한 업무 처리 능력과 함께 6공의 정치적 안정으로 역대 총장 중 가장 조용하게 서울대를 이끌고 있다는 평이다. 조총장은 학내안정을 바탕으로 국제학술교류강화·연구소활성화·연구시설확충 등 교육여건 개선과 연구 분위기 조성에 앞장선 수장으로 꼽히고 있다. <이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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