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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교육의 '잃어버린 3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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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우연한 기회에 한국의 같은 학년들이 본다는 자습서를 큰딸에게 보여줬더니 도무지 이해를 못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동네 일본인 아줌마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대부분의 일본인은 공립학교에서 제대로 공부시키는 걸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돈 좀 있으면 사립학교를 보낸다는 것이다.

일본은 요즘 입시철이다. 대학입시 열기는 한국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요즘 일본에서 대학입시보다 더 많이 보도되는 것이 사립중학교에 가려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의 열기다. 올해 도쿄(東京)를 비롯한 수도권 초등학교 6학년생 여섯 명 가운데 한 명은 사립학교를 지원했다고 한다. 그 비율은 사상 최대다.

이유는 뻔하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감 때문이다. 30년 전에 도입한 '유토리(여유) 교육'은 "스스로 배우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살아가는 힘'을 가르치자"는 취지였다. 당시에는 모두가 공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현재 공립 초등학교.중학교의 학습량은 1970년대 말의 절반 수준이 됐다. 유토리 교육의 취지는 증발하고 교육현장에선 주 5일제 수업, 교과내용 축소만이 남았다. 초등학교 5학년 산수 교과서에서 사다리꼴 면적을 구하는 공식이 사라지고, 6학년 과학 교과서에선 심장의 구조가 모습을 감췄다. 총체적 학력저하로 이어졌다.

기업들이 들고 일어났다. "도대체 교육을 어떻게 했기에 이 모양이냐"는 거다. 참다 못한 게이단렌(經團連)은 지난해 일본 정부에 '의무교육 개혁에 대한 제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일 정부도 더 이상 체면을 내세우기 힘들게 됐다. 30년간 해 보니 "이건 아니구나"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최근 '교육재생회의'는 ▶수업시간 10% 증가 ▶토요수업 실시 등을 골자로 하는 '유토리 교육 포기'를 선언했다. '학력 부활'과 '부적격 교사 퇴출'이 개혁안의 양대 기둥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 공교육의 흐름을 보면 일본과 정반대다. 2005년 3월 주 5일제 수업을 도입한 한국은 현재 매달 두 번 토요일에 학교를 쉰다. 앞으론 매주 주 5일 수업을 추진한다고 한다. 일본과 달리 수업시간 축소로 가는 것이다.

당장 일본이 겪은 학력저하를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려되는 건 바로 '사교육 조장'이다. 교육열 뒤지는 건 못 참는 우리 학부모들이 자녀가 토요일에 한가롭게 '인성교육'하게 놔둘 학부모들인가. 일본 학부모 10명 중 한 명이 사립학교로 발을 돌렸다면 한국 학부모 10명 중 절반 이상은 자녀를 학원과 과외로 돌리지 않을까. 일본이 겪은 공교육 불신,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격차 확대를 답습하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렵다.

일본의 공교육 개혁안을 보고 또 하나 느낀 점. 일본의 전교조 격인 일교조는 15년 전 토요수업 폐지에 적극적이었다. 교육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교원면허 갱신제'에는 강력히 반대했다. 그 결과 학생들의 학력저하를 가져오자 요즘 일교조는 호된 비난을 받고 있다. 이를 의식한 듯 일교조는 2002년 "지방공무원인 공립학교 교사가 방학기간 중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정부의 방침에 순순히 따르고 있다. 원칙적인 전원 출근이다. 방학기간 중 일직까지 없앤 전교조와 대조가 된다. 교원평가에 저항하는 전교조와도 접근방식이 다르다.

일본 공교육의 '잃어버린 30년'의 교훈은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10년'의 교훈 못지않게 우리에게 중요하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