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밥이 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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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파나마 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 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밥 줄까?”하면, “아니 딴 거!”. 그래도 끼니때마다 밥을 차려놓곤 합니다. 밥심이 뒷심이고, 뒷심이 바로 이 생을 버틸 수 있는 뚝심이지요. 그러나 만만한 게 ‘밥’이고 ‘밥맛’이 욕된 지 오래. 쓰는 것에 지쳐 먹는 밥이 썼습니다. 쓰지 못한 밥이 너무 많아 더 쓰고 싶었지만 이만 총총이라고 씁니다. 당분간은 밥이 달겠지요?

<정끝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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