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Movie TV] '하류인생' 촬영장을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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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우는 무섭기도 하고 완전히 지쳐서 숨어있는 거야. 겨우겨우 기어서 들어온 거지. 민선이는 조금 퉁명스러워도 돼. 승우가 몸을 피했으면 괜찮을 일을 굳이 싸워서 처참하게 돼 있으니까."

감독의 연기지시를 듣고 있는 주인공 조승우는 전날 밤 찍은 액션장면에서 혼자 수십명과 맞서 싸운 뒤 피묻은 차림으로 불꺼진 음식점 안쪽에 쓰러져 있는 상태다.

건달이기는 해도 그의 순수한 마음에 매료된 양가집 딸 김민선이 찾아와 어렵사리 몸을 부축해 일으키려는 참이다. 골목 반대편의 수림다방에서는 건달차림의 사내들 한 무리가 진을 치고 앉아 자신들의 촬영 순서를 기다린다.

이쯤에서 짐작하시는 대로, '하류인생'은 국민영화가 된 '서편제'와 지난해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취화선'의 영광 때문에 잠시 잊혔던 임감독의 액션 혈기가 다시 발휘된다는 점에서부터 관심을 끄는 작품이다. 80년대 중반 히트한 '장군의 아들'시리즈는 물론이고, 이미 60년대부터 숱한 액션장면을 빚어온 그는 "주기적으로 액션영화를 찍어온 셈"이라면서 "저에게는 액션의 매력이 체질화돼 있다"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하류인생'의 액션이 홍콩영화의 와이어액션을 과장되게 흡수한 '매트릭스'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준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임감독은 "요즘 보는 기예화된 액션은 '격투놀이'지 '격투'가 아니다"라면서 "실제 싸움판을 보는 것 같은 사실감을 담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촬영장에 그 흔한 와이어 장비 대신 맨몸으로 각목과 주먹에 부딪혀야 하는 무술배우들의 긴장감이 넘쳐나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여기에 자유당 정권 말기에서 4.19와 5.16에 이르는 탁류(濁流) 같은 시대가 배경으로 흘러가고, 그런 속에서 피폐해진 주인공의 인간성이 실은 맑디 맑은 것이었음을 확인해 주는 로맨스가 곁들여진다.

임감독은 "단순한 액션영화가 아니라 멜러도 있고, '소셜'(social)적인 요소도 아주 강렬하게 그려질 영화"라고 설명했다. 건설업과 영화제작에도 손을 대는 태웅의 인생행보에 따라 영화 속에는 당시 영화계의 에피소드도 적잖이 곁들여질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60년대 명동은 임감독을 포함, 정일성 촬영감독.이태원 제작자로 이루어진 '거장 3인조'가 20대 청춘을 보냈던 바로 그 무대다.

"그동안 돈 안 되는 영화를 해온 감독인데, 이번에는 흥행작을 해보겠다"고 속내를 숨기지 않는 임감독이 자신의 장기를 가장 잘 발휘할 공간을 선택한 셈이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청춘을 보낸 신중현씨에게 영화음악을 맡긴 것 역시 당연한 선택으로 보였다. 60년대 한 차례 신씨와 함께 작업했던 임감독은 "다른 사람은 떠올릴 수 없었다"고 했다. 영화 속에는 '님은 먼 곳에'와 같은 신씨의 히트곡과 새로 만드는 음악이 두 갈래 효과를 내며 쓰여질 계획이다.

어느새 가을밤의 냉기가 촬영장을 감쌌지만 희끗희끗한 머리를 짧게 깎은 60년대 청춘들과 주연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원 오디션을 통해 뽑은 1백여명 젊은 배우들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하류인생'은 40%가량의 분량을 이곳 오픈세트에서 찍고, 나머지는 부산.전주 등 전국의 도시 풍경을 무대로 촬영할 예정이다.

주먹과 예술과 삶이 어우러졌던 명동에서 '하류'를 자부하고 살아온 이들의 실체는 촬영이 완료되는 내년 봄 온전히 드러날 전망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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