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시인 이시영 '창비' 떠나며'은빛 호각'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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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시인 이시영(53)씨는 지난 3월 자신의 이름 앞에 관용어구처럼 따라다니던 '창비'라는 단어를 떼어버렸다. 1980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 편집장으로 입사해 햇수로 24년을 보낸 정든 직장을 상임고문을 끝으로 그만둔 것이다.

창비를 직장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씨와 창비 모두에게 섭섭한 일이 된다. 82년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 출간으로 인한 안기부 연행, 89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소설가 황석영의 방북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실었다가 구속된 사건 등 이씨의 연보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연행.구속의 이력은 대부분 창비의 테두리 안에서 작성된 것이다. 이씨는 편집장.주간.부사장 등을 지내며 계간 '창작과 비평'의 80년 폐간과 88년 복간을 지켜보기도 했다.

당연히 창비를 그만두었을 때 이씨의 심경이 심상한 것이었을 리 없다. 그러나 이씨는 "관형사처럼 붙어 있던 '창비'라는 말이 떨어져 나가자 자유로웠고 시를 좀 더 열심히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97년 '조용한 푸른 하늘' 이후 6년 만에 나온 이씨의 여덟번째 시집 '은빛 호각'(창비)은 여유가 생긴 이씨가 내놓은 첫 결과물이다.

1.2부로 나뉜 시집의 2부에는 유행처럼 민중서사가 넘쳐나던 80년대 후반부터 이씨가 선보여 온 선시 같은 짧은 시편들을 모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씨가 짧은 시에 매달린 이래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이씨의 '이야기시'(산문시)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1부다. 1부에 묶인 산문시들은 대부분 3월 이후 쓴 것들이다.

이씨는 산문의 한 대목을 불친절하게 행갈이도 없이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산문시들을 통해 기억 속의 옛 시간, 옛 인물들을 호명해 내 대화를 나눈다. 이씨는 그런 기억을 불러내는 일을 '죽은 시간과의 대화'라고 표현했다. '레퀴엠'에서는 검열을 받기 위해 잡지 대장(臺狀)을 들고 시청을 찾아갈 때마다 들려왔던 검열단장의 레퀴엠 피아노 연주를 끄집어 냈고, 시집 두쪽을 빽빽이 채운 장시 '잠실시영아파트'에서는 아파트 단지 공중 목욕탕에서 목격했던 시인 김남주의 넓은 등, 79년 10월 27일 아파트 단지를 뒤덮으며 '대통령 유고'를 전하던 호외 등을 기억해 낸다.

그러나 음울한 과거를 되살려내는 일이 아직까지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시편들에서 과거는 음울하기보다 따뜻하다. 가령 이씨의 고향 구례읍 로터리에서 은빛 호각을 불며 교통정리하던 제복 차림의 순경을 다룬 '푸른 제복'에서 순경의 호각소리는 등교하는 중학생들을 놀라게 하고 우마차.지게꾼들에게 위협이 되며, 농부의 착한 소가 푸른 똥을 싸게 만드는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씨는 교통순경이 '구례읍의 푸른 근대의 상징이자 뒤꼭지가 툭 튀어나온 권력의 작은 집행자'였다면서도 그가 없으면 읍내가 교통 진창이 되고 사나운 개들이 심심해 하였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시의 순도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산문시라는 형식을 통해 죽은 시간을 불러내는 이유는 뭘까. 이씨는 "점점 삶의 자연스러움, 의뭉스러움, 낙천성 등을 볼 수 없게 되고 있다. 시마저 지나치게 의도적으로, 하나의 상품처럼 정교하게 제작되는 것 같다. 내 시는 미꾸라지처럼 순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씨는 자신의 시가 날렵한 도회의 삶을 다루는 모더니티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신준봉 기자<inform@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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