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깊이읽기] '시청자의 힘' 세긴 세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8면

"성인들만 보는 것도 아닌데 혼전 성관계를 유도하는 듯한 대화에 실망입니다."

"설마 그 시간에 아이들이 다 잔다고 생각하고 프로그램을 만드신 건 아니죠?"

이달 초 신설된 SBS의 '최수종쇼'방송 직후 시청자 게시판은 벌집 쑤신 듯했다. 연예인 패널들이 일반인의 성 고민을 상담해 주는 형식을 취한 '스무살의 저녁식사' 코너가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비난글이 무더기로 올라온 것이다. "다른 코너는 그런 대로 재미있으니 '스무살…'만 끝내면 되겠다"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시청자도 여럿이었다. '방송을 통해 솔직한 성 담론을 이끌어내겠다'던 제작진의 기획의도는 결국 시청자들의 단결된 목소리 앞에 꺾일 수밖에 없었다. "반응을 보니 아직 시기상조인 듯하다"(박재용 PD)며 방송 2주 만에 문제의 코너를 접기로 한 것이다.

'스무살…'의 조기 폐지는 나날이 커지는 시청자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맘에 안 드는 프로가 나오면 그저 채널을 돌려 버리던 소극적인 자세는 옛일이다. 불량 자동차에 대해 반품을 요구하듯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적극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청자들의 등쌀에 의한 '최수종쇼'의 코너 폐지 결정은 제조업의 '리콜'조치나 마찬가지다.

시청률 1위 프로인 MBC '대장금' 역시 시청자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족집게처럼 '옥의 티'를 잡아내 이를 공론화하는 시청자의 힘 앞에 '사극의 달인'이라는 이병훈 PD는 두 차례나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시청자 게시판에 지난달 "'단도리'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사과한 데 이어 17일엔 "만한전석이나 제주도 관찰사 건은 어처구니없는 실수요, 무식함의 소치"라며 반성의 글을 올린 것이다.

형편이 이러니 방송가에선 "시청자 무서워 프로 못 만들겠다"는 비명도 나온다. 방송사들이 정말 시청자를 무서워하는 마음으로 프로 하나하나를 만드는 것이 정도가 아닐까.

신예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