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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일본경제] 中. 디지털로 승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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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지난 9월 25일 오후 도쿄의 한 호텔에서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MS)사가 일본의 기업들과 학계로 구성된 '트론'이란 운영체계(OS) 연구단체에 합류, 새로운 정보가전용 OS를 공동 개발키로 한 것이다.

윈도를 앞세워 운영체계 시장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해 온 MS가 사실상 디지털 가전의 선두 주자로 자리잡은 트론에 'SOS'를 친 것이다. 1990년대 초 PC시장에서 MS에 맞섰다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퇴출됐던 일본 연합군 '트론'이 정보가전용 OS로 '세계의 MS'를 무릎 꿇린 것이다.

지난 16일 도쿄 신주쿠(新宿)역 앞의 '요도바시 카메라'의 멀티미디어관. 지난 9월까지만 해도 PC 주변기기로 꽉 차 있던 플로어가 완전히 새 모습으로 바뀌었다. 디지털 카메라.액정 및 PDP TV.DVD 등 이른바 '디지털 3총사'가 장악을 한 것이다.

매장 매니저인 이케다 스스무(池田進)는 "PC로 상징되던 1차 정보기술(IT) 붐이 지나고 디지털 가전이 주도하는 2차 IT 붐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그런데 이 부분은 핵심 기술 등에서 일본 업체들의 독주상태"라고 말했다.

현재 일본 업체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디지털 카메라 95% ▶DVD 65% ▶PDP TV 90%에 달한다.

지난달 24일 도쿄 시나가와(品川) 재개발지구에 우뚝 서 있는 소니의 테크놀로지센터. 첨단상품 개발과 기획을 담당하는 1천여명의 두뇌가 자유스러운 복장으로 머리를 맞대고 각종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DVD 상품기획 총괄부장인 무라이 료지(村井良二)와 총괄과장인 시미즈 도오루(淸水徹)는 올해 세계시장 규모 5천8백50만대인 DVD 플레이어에 대한 질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98년 이후 소니가 줄곧 '세계 넘버 원'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인데도.

시미즈 과장의 머릿속엔 온통 DVD 레코더 생각뿐이었다. 그는 "DVD 레코더의 올 시장 규모가 3백50만대에 불과하지만 시장이 그쪽으로 확 이동하고 있어 이 부문 선두주자인 마쓰시타(파나소닉).파이오니아.도시바를 따라잡기 위한 생각에 여념이 없다"고 말했다.

소니는 이를 위해 96년부터 구상해 온 비장의 기술을 최근 내놓았다. 모든 TV 프로그램 리스트를 다 기억하고 고객의 선호를 채널고정 시간 등을 통해 스스로 간파해 녹화 추천까지 하는 기능이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유럽시장까지 적용이 되는 기술이다.

시미즈 과장은 "이는 소프트웨어 개발기술뿐 아니라 시청자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까지 결합해야 하는 기술로 소니가 아니면 이뤄내기 힘든 기술"이라며 "2005년에는 DVD 플레이어에 이어 DVD 레코더도 세계시장을 석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실제 소니는 DVD 레코더의 수요 폭발로 지난 봄 월 2만여대였던 생산 규모를 월 15만대로 늘린 상태며 내년에는 생산시설을 두배로 늘리기로 결정한 상태다.

캐논의 디지털 카메라 공장이 있는 규슈(九州) 오이타(大分)공장. 이곳은 요즘 전 세계에서 주문이 쇄도하면서 4시간 잔업으로도 안돼 '2교대 근무체제'로 풀가동 중이다. 올해 세계 시장의 21.5%인 8백50만대를 생산하며 선두 업체로 올라선 캐논은 불과 4년 전 25만대 생산체제에서 34배로 몸집이 커졌다. 2005년부터는 오이타 제2공장이 가동된다.

우에노 아쓰시(上野敦)부장은 "현재 아날로그 카메라의 보급률이 90%인데 비해 디지털 카메라는 30%에 불과해 앞으로 세배는 시장이 더 커질 것"이라며 "게다가 디지털 카메라는 '윈도 95' '윈도 98'처럼 계속 진화돼 무궁무진한 사업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1915년 연필을 대신해 '샤프'펜슬을 처음으로 개발한 데 이어 수많은 '세계 최초'상품을 만들어 온 샤프사가 지난달 '소리나는 액정'을 개발했다. 물론 이것도 세계 최초다.

하나의 유리 기판 위에 액정 회로와 오디오 회로를 같이 탑재해 스피커가 따로 필요없게 만든 것이다. 손가방 속에 넣고 다닐 수 있는 '꿈의 두께'를 실현한, 이른바 '모바일 시트(종이) TV'의 개발에 성큼 다가선 이 쾌거를 우노 유키야스(宇野之康)홍보부장은 "90년대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온리 원(only one)'전략을 관철시켰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를 통해 샤프는 올해 총 3백만대에 달하는 전 세계 액정TV 시장에서 50%가 넘는 1백50만대 이상을 차지하겠다는 전략이다.

이 같은 디지털 가전의 비약적인 성장 뒤에는 '다들 몰락한 줄만 알았던' 일본 반도체의 구조전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본 반도체산업신문 이즈미야 와타루(泉谷涉)편집장은 "90년대 들어 일본은 미국과 한국에 뒤처지기 시작한 D램 중심의 사업구조에서 마이크로 컨트롤러나 시스템 LSI 등의 고부가가치 쪽으로 일찍이 방향을 틀었다"며 "PC산업이 한계에 부닥치며 결과적으로 일본의 전략이 맞아 떨어진 셈이 됐다"고 분석했다.

예컨대 DVD용 시스템LSI에서는 마쓰시타가 압도적인 세계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고 디지털 카메라에 쓰이는 특수반도체인 전하결합소자(CCD)는 소니가 80%를 장악하고 있다. 또 휴대전화용 CCD는 산요가 50% 이상을 차지한다.

전 세계 68개 반도체 업체가 가맹한 '세계반도체시장통계(WSTS)'에 따르면 올해 일본의 반도체 생산액은 3백59억달러(약 4조엔)로 실로 11년 만에 미국(3백13억달러)을 제치고 '반도체 대국'으로 재부상하고 있다.

산업계에서는 "일본이 드디어 구조조정이라는 '수비형'에서 설비투자 확대라는 '공격형'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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