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 공무원 철밥통 깨기 '인사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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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범죄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거나 파면 등의 사유 외에는 강제로 면직시킬 수 없다'.

지방공무원법 제60조에 있는 '공무원 신분보장 규정'이다. 울산시가 이 규정만 믿고 시민의 세금으로 받는 월급만 축내고 일은 뒷전인 이른바 '철밥통 공무원'들을 현직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울산시와 울산남구청은 23일 실시한 정기인사에서 해당자의 이름은 없고 인원 수만 표시한 '이상한' 인사명단을 내놨다. 사무관(5급) 4명과 주사(6급) 3명 등 7명.

바로 얼마 전까지 구청에서는 과장이나 동장, 시청에서는 계장급 자리를 맡아 온 이들이지만 이번엔 그런 보직이 없다.

울산시 최병권 자치행정국장은 "사실상 퇴출 대상인 사람에 대해 명단까지 공개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같아 본인에게만 통보했다"고 말했다.

최 국장은 "보직을 박탈당하고 교통량 조사 등 직급에 어울리지 않는 허드렛일을 맡게 될 이들이 1년 뒤에도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 자진 사퇴를 유도하겠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대상인가=시에 따르면 A씨의 경우 자기 업무는 팽개치고 있다가 간부나 주변에서 나무라면 시시콜콜 수집해 뒀던 약점을 들이대며 협박을 일삼았다. B씨는 지난 7개월 동안 결재 한번 받은 적 없이 부하직원에게 업무를 미뤘다. 동장인 E씨는 남구청 전체가 97억원의 체납세를 징수하는 등 지방세 정리에 매달리는 동안 단 한 건의 실적도 없었다.

울산시 최문규 기획관리실장은 "인사철마다 간부들 간에 '이번 인사에서만은 다른 부서에서 받아줘야 한다'며 신경전을 벌이는 기피 대상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 왔다"며 "이들을 정리하지 않고는 행정혁신이 공염불에 그친다는 판단에서 '시정자문단'이란 이름으로 이 제도를 시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울산시는 "실.국장이 이번 인사를 앞두고 정원의 3배수를 추천하는 작업을 세 차례나 반복했는데도 4명은 한 번도 추천받지 못해 결국 시정자문단에 배속됐다"고 밝혔다.

◆어떤 일 하나=최 실장은 "시정자문단제는 남아도는 인원을 정리하는 구조조정과는 별개로 세금만 축내고 업무추진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는 사람을 솎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울산시의 경우 현재도 4~6급이 정원보다 9명 부족한 실정이지만 직무대행 체제로 꾸려가고 있다.

울산시는 시정자문단에 배속된 사람에게 시내버스 교통량 조사나 풀베기, 쓰레기 제거 작업 등 주로 일용직들이 해오던 허드렛일을 시킬 계획이다. 여기서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경우 자진 사퇴를 유도하며, 이들이 원할 경우 언제라도 재취업 교육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획기적 인사제도"평가=지난해 8월 이 제도를 시행한 대구시는 큰 효과를 봤다는 입장이다. 보직이 박탈된 7명 중 사무관 2명을 관리하고 있는 권오곤 교통국장은 "하루종일 도심 승강장을 돌며 시내버스 배차 간격과 교통표지판 훼손 여부를 점검하라고 시켰다"면서 "며칠 못 가서 제풀에 사표를 낼 줄 알았는데 거의 매주 개선안을 만들어 오고, 더 시킬 일이 없느냐는 등 사람이 확 달라졌다"고 말했다. 또 "대구시 전체 공직사회에도 '철밥통 시대는 갔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기업체 못지않은 긴장감.경쟁의식이 살아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울산대 정준금(행정학) 교수는 "그동안 법적 신분보장에 안주해 온 공무원들도 지금부터는 직분에 걸맞은 실적을 내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의식을 깨우쳐 준 획기적인 인사제도"라고 평가했다.

정 교수는 또 "다만 간부들이 대상자를 선발할 때 학연.지연 등을 떠나 얼마나 객관성.투명성을 확보하느냐가 제도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원.홍권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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