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여성 협상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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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우이(吳儀)와 칼라 힐스. 현대 외교사에서 나름의 족적과 함께 뚝심과 배짱으로 숱한 화제를 남긴 여걸들이다. 중.미 지적재산권 분쟁 협상이 한창이던 1990년대 초반 이들이 벌인 기(氣)싸움 한 토막이 흥미롭다. 협상 단장인 힐스 당시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중국의 불법복제 관행을 겨냥해 "좀도둑과 담판하러 왔다"고 비꼬았다. 대외경제무역부(현 상무부) 부부장이던 우이는 "우린 (과거 중국 유물을 강탈해 간) 날강도와 담판하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그는 이를 계기로 '중국 철낭자(鐵娘子)'란 별명을 얻었다. (윤덕노.'중국 권력 대해부')

우이는 부총리가 된 뒤에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의 회담을 목전에 취소해 화제를 뿌렸다. 힐스는 90년대 초 한국과의 쌀시장 개방 협상에서 '철(鐵)의 여인'의 면모를 우리 뇌리에 깊이 새겼다.

사실 두 사람처럼 기질이 드센 여성 협상가는 흔치 않다. 요구하고 도전하고 대립하는 데 덜 익숙한 여성이 어떻게 하면 남자만큼 협상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게 학계의 오랜 연구과제인 걸 봐도 알 수 있다. 근래에는 죽고살기식의 제로섬 협상보다 파이를 키워서 나눠 먹는 '통합.복합 협상' 개념이 외교 분야에서 중시되면서 여성의 부드러운 감성이 점차 빛을 발하고 있다. (린다 배브콕.'여성을 위한 협상론')

하지만 힐스에 이어 샬린 바셰프스키.수전 슈워브 등 USTR 대표의 계보를 여성이 이어가는 미국을 보면 우리의 갈 길은 멀어 보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회담의 미국 측 대표인 웬디 커틀러가 지난주 국내 국제학 전공 여대생들을 모아놓고 "여성이 더 좋은 협상가가 될 수 있다"는 덕담을 해줬다. 상대의 말을 더 경청하고, 협상 준비를 더 철저히 하는 게 장점이라는 것이다. 하긴 이런 특성이 단지 외교관 지망생에게만 필요한 건 아닐 것이다. 인생도 따지고 보면 협상의 연속이다. 배우자나 직장을 선택하는 일에서, 집 사고 심지어 아이들 달래 잠자리에 들게 하는 것도 협상이다. 'negotiation'에는 협상 말고도 흥정.교섭.절충 같은 넓은 뜻이 담겼다.

그러고 보면 협상장 밖 이벤트까지 구사하는 커틀러의 스타일은 직선적인 칼라 힐스와 대조된다. 여성 협상가의 섬세함이 배어난다. 한 치 양보 없는 한.미 FTA 전장에서 협상 상대국 여학생들과 어울려 파안대소하는 커틀러의 신문 사진 모습을 보면 고도의 장외 협상전략이 느껴진다.

홍승일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