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 「멍에」딛고 밝은 시어 쏟아내-시집『얘야 내가 도와줄께』낸 뇌성마비 시인 서정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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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힘없고 비틀어진 작은 손이지만/당신께서 쓰신다면/힘센 손이 될 거예요/아버지 제 손을 써 주세요/메마르고 썰렁한 좁은 마음이지만/당신께서 쓰신다면 넓은 마음 될 거예요/아버지 제 마음을 열어 주세요.』 (『당신께서 쓰신다면』 중에서)
뇌성마비 여류시인 서정슬씨(45)가 네번째 시집『얘야 내가 도와줄께』를 펴내 다시 시단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선천성 뇌성마비에 사로잡힌 그를 대하면 산지사방으로 뒤틀리는 그의 육체의 한 자락인 손가락을 통해 어떻게 이렇듯 맑은 시정이 샘솟아 나올까 숙연해진다.
그는 인간이 얼마만큼 절망을 극복하고 승화시켜 또 다른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지난 80년 첫 시집 『어느 불행한 탄생의 노래』를 출간, 세인을 놀라게 했던 그는 그 동안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83년), 『꽃달력』(87년)에 이어 4년만에 다시 92편의 시를 모아 『얘야 내가 도와줄께』를 펴내 육체의 멍에를 뛰어넘은 그의 영혼이 성한 사람도 잃어버리기 쉬운 평화와 화해의 세계에 도달해있음을 펼쳐 보이고있다.
그는 『하느님이 쥐어주신 작은 두레박으로…맑은 물 퐁퐁 솟는 샘가에 앉아 마음을 가만가만 길어 모았습니다』 라고 시집에 쓰고 있다.
골방의 소외감속에서 후년을 피멍지게 극복해 온 세월이었지만 이제 그는 우는 듯 웃는 듯 뒤틀어진 발음으로 『난 행복하답니다. 고통이 있다면 작은 고통이에요』 라고 말해 그의 아픔을 화제 삼아 떠벌리는 일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고려대 서영갑 명예교수(71·공과대)의 6남매 중 둘째딸인 그는 온몸에 끊임없이 경련성마비가 계속되는 완전 불구의 몸으로 태어났다.
「처참한 시련」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의 육체에 감춰진 「명석한」두뇌와 「영롱한」 시심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10세가 되면서부터. 오빠·동생의 어깨너머로 아무도 모르는 사이 한글을 깨우친 그는 잔인한 운명에 항거하듯 온몸을 짓눌러 한줄 한줄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
그는 일생의 반려자이며 통역자인 어머니 석정수씨(71)의 뜨거운 사랑에 힘입어 14세부터 어린이 신문 등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79년 시인 홍윤숙씨에게 발탁돼 80년 첫 시집을 낸 이래 그 동안 모두 4백여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는 경련하면서 뒤틀린 음성으로 말한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이 시집이 많은 장애인들에게 티끌만큼의 힘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수녀가 되고 싶었다』는 그는 모눈종이 같은 천에 수십번 반복해 뜯어 고쳐가며 한땀 한땀 엮어내는 자수에도 심취, 그가 얼마나 엄격하게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가도 엿보게된다.
한국 장애인문인협회는 그의 시집을 위한 출판기념회를 22일 오후3시 서울 명동성당내 샬트르 바오로 수녀회 교육관 1층에서 갖는다. <고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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