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농촌' 지원이 뜻하는 것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젊은 농군 심민보씨는 늘 웃는 얼굴이다. 농업시장 개방의 파고가 눈앞에 닥쳤는데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환하다. 본디 심성이 착하고 밝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농업시장이 열린다고 해서 굳이 얼굴을 찌푸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도 농촌을 떠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나갈 자신이 있다.

그는 내가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주말농장의 농장주다. 주말농장이라고 해봐야 그가 사는 집앞 1천여평의 텃밭을 5평, 10평씩 1백여개로 쪼개 놓은 정도다. 이 땅을 평당 1만5천원씩 도시민들에게 빌려줘 받는 돈은 1년에 2천만원 남짓. 이걸로는 생계를 꾸리기 어렵다. 실은 주말농장은 부업이고 그의 실제 주수입원은 쌀과 신선야채다. 그가 파는 유기농 쌀은 20㎏ 한 부대에 8만원으로 시중에서 팔리는 일반쌀보다 두배 이상으로 비싸다. 주문하면 즉석에서 도정해 최상의 품질상태로 배달해 준다. 채소도 화학비료나 농약을 전혀 쓰지 않는 유기농 작물로 일반 채소보다 비싸게 팔린다. 주문판매만 하는 그의 유기농작물이 불티나게 팔리는 데는 부업인 주말농장이 한몫을 했다. 그는 농사에 문외한인 도시의 주말 농부들을 상대로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고 작물을 재배하는 법을 일일이 가르친다. 일단 그의 주말농장을 거쳐간 이들은 자연히 유기농작물에 관심을 갖게 되고, 조만간 고객으로 바뀐다.

심씨의 농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6천평에 이르는 대규모 주말농장을 운영하는 농민후계자 박순규씨는 아예 주말농장을 전업으로 한다. 5백계좌를 분양하는 그의 주말농장엔 내년 시즌의 텃밭을 미리 예약해두려는 사람들이 벌써부터 줄을 섰다. 대규모 주차장에 각종 편의시설과 야외 바비큐 시설까지 갖춘 그의 주말농장은 웬만한 휴양단지를 능가하는 명소가 됐다.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점에서 박씨는 엄격한 의미의 농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는 농사지식과 얼마간의 땅을 활용해 농사를 짓지 않고도 농촌에서 충분히 돈을 벌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부가 최근 모처럼 농업.농촌대책에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보여줬다. 앞으로 농정의 초점을 '농업'에 대한 지원에서 '농촌'에 대한 지원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농사를 짓지 않고도 농촌에서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농사만 짓도록 묶어놓은 농지에 대한 각종 규제를 과감하게 풀어 다른 용도로도 얼마든지 쓸 수 있게 하고, 그래서 10년 후 쯤에는 농사 이외의 사업에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3분의 2가 넘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그동안 우루과이라운드(UR)다, 뉴라운드다 해서 농업시장 개방 문제가 나올 때마다 내놓은 대책은 가능한 한 개방을 막거나 미루면서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62조원을 퍼부어 얻은 것은 줄어든 농촌의 소득과 늘어난 농가의 빚뿐이다.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엔 무얼 더 해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늙은 농부들만 남았다.

농민단체들은 여전히 농산물시장 개방에 결사 반대다. 그러나 개방만 막으면 우리 농업이 살아날 희망이 있을까.

농촌 문제의 해답은 정부의 지원이나 거리에서의 시위로 찾아지지 않는다. 정부를 탓하고 세계화를 반대하는 것만으로 없던 경쟁력이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농촌을 살릴 1차적인 책임은 농민 스스로에게 있다. 이미 전국 곳곳에서 유기농과 원예, 특화된 농업관광 사업으로 농촌의 활로를 찾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젊은 농업인 심씨와 박씨는 그 희망의 실마리를 보여준다.

김종수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