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의영화만담] 종군기자는 왜 카키색 조끼를 입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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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이 무대입니다. 다이아몬드 밀수꾼 대니 아처(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종군기자 매디 보웬(제니퍼 코넬리)의 고생담과 연애담이 주 내용이죠.

내전과 테러로 얼룩진 제3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할리우드 영화는 습관처럼 기자를 등장시킵니다. 관객과 다를 바 없는 외부인이면서 적당히 내부의 진실을 체험할 서양인(특히 백인) 주인공을 지어내려니 만만한 게 종군기자일 수밖에요.

관객들이 종군기자 시점으로 현실을 관망하게 하는 수법도 전형적이지만 그보다 더 전형적인 건 바로 기자의 차림새입니다. '21세기 대중 문화 속의 전쟁'(이룸)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국제 구호단체들이 늘 4륜 구동 지프를 몰고 다니듯, 전형적인 종군기자들도 식민 스타일과 사파리 스타일, 그리고 게릴라 스타일의 중간쯤 어디에 있을 법한, 주머니가 여러 개 달려 있는 조잡한 조끼를 입고 다닌다."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한겨레신문사)의 저자는 현장 기자들 사이에서 이 조끼를 'CBS재킷'이라 부른다고 귀띔합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국 CBS 기자들이 단체로 맞춰 입으면서 유행한 이 카키색 사파리가 한동안 종군기자의 신분증 노릇을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요즘엔 분쟁 지역의 최고급 호텔에 앉아 말쑥한 와이셔츠를 차려입고 전쟁 소식을 전하는 게 추세라 하네요.

이 영화에는 종군기자 말고도 또 하나 전형적 캐릭터가 등장하죠. 바로 밀수꾼 대니 아처입니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가장 선호하는 캐릭터, 즉 '마지막 순간에 선행을 실행해 위기에 빠진 수많은 사람을 구하고 자신은 죽는 악당'의 전형입니다. 소설가 안정효는 '글쓰기 만보'(모멘토)라는 책에서 이런 설정이 "서양의 기독교적 잠재의식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악한이 순식간에 그리스도로 변신하는 이 장치는 온갖 잘못을 저지르고도 한 번만 제대로 회개하면 천국으로 간다는 비겁한 종교적 계산법"이라고 비판하는 거죠.

요즘 부쩍 아프리카 배경 외화가 많습니다. '호텔 르완다''콘스탄트 가드너'에 이어 곧 개봉할 '바벨'까지. 기아와 전쟁으로 신음하는 야만의 역사에 휩쓸린 문명국 이방인들 이야기가 유행처럼 제작되고 있습니다. 도통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하던 미국인들이 9.11 테러 이후 부쩍 다른 세계, 특히 저개발 제3세계 국가의 내부 사정을 궁금해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더군요. 그렇다면 '순식간에 그리스도로 변신하려 애쓰는' 영화 속 그 많은 악한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요즘, 미국인 자신들의 '비겁한 종교적 계산법'을 반영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CBS 재킷을 입고 전장을 누비는 전쟁기자'와 '순식간에 그리스도로 변신하는 악한'. 이 두 가지 전형성 덕분에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본의 아니게(!) 몹시 역설적인 현실 고발 영화로 읽힙니다. 참으로 본의 아니게 말이죠.

김세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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