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개방 앞서 체질개선 시급(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금리문제를 다루는 정부의 자세를 보면 도대체 이 나라에 금융정책이라는 것이 있는지 의심스러워 진다.
88년에 금융시장의 국제화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대출금리의 자유화를 선언했다가 금리상승에 따른 부작용때문에 통화증발만 유발한채 창구지도란 편법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최근에는 다시 금리상승에 의한 경기진정효과와 국제화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금리자유화를 서둘고 있는 모양이나 이번 계획도 발상의 깊이와 추진방법 등에서 엿보이는 허점 등으로 미루어 과연 제대로 실시될지 의문일 뿐만 아니라 실현이 된다 해도 뒤처리가 걱정스럽다.
이런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선 우리의 금융시장 여건이 자금의 만성적인 초과수요라는 88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 때문이다. 오히려 자금의 수급사정을 보면 무역수지 흑자가 피크를 이루었던 당시보다 지금의 형편이 훨씬 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자금의 공급에 애로가 큰 상황에서 대출금리를 자유화 한다는 것은 금리상승을 전제로 한 것이고 금리상승은 전반적인 기업부담가중으로 경쟁력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특히 담보력이 약한 중소기업에는 존립을 위협하는 문제가 된다.
금리상승을 통한 경기진정효과를 기대한다는 정부의 또 하나의 논리는 이해할만 하나 이는 자금의 수급이 형평을 이룬 상태에서 금리가 시장기능의 촉매역할을 할 때의 이야기다. 우리처럼 만성적인 자금수급 불균형상태에서는 산업의 숨통을 조이겠다는 얘기밖에 안된다.
통화관리수단으로 정부는 지금의 총통화관리방식 대신 본원통화규제방식을 채택하겠다고 하나 간접규제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마련돼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우리가 정부의 금리자율화방침에 의구심을 갖는 더 큰 이유는 이번 계획이 금융시장의 개방과 직접 맞물려 있는데도 전체 개방계획과의 연계 아래서 추진되지 못하고 금리자유화는 바로 국제화에 접근하는 길이라는 단순논리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가 금융자유화,금융시장 개방을 추진하는데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과거 계획경제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각종 정책금융을 개방경제 체제 아래서 어떻게 처리해 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다.
농업·중소기업·수출산업 등에 대한 특별이자와 특혜금융은 경쟁원리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고 미국 정부도 이 문제를 계속 거론,이들 정책금융제도의 정비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금융시장 개방을 논의하려면 이같은 문제들에 대한 우리 금융시장의 구조적 전환이 전제돼야 하고 기업의 금융분담과 경쟁력 문제들이 장기적 안목에서 검토돼야 한다.
개방을 앞둔 구조조정의 문제는 비단 금융부문뿐만 아니라 우리 산업의 도처에 깔려있는 근본적인 과제다. 정부는 외부의 압력에 밀려,혹은 눈앞의 단기적인 정책효과를 얻기 위해 땜질식의 정책으로 갈팡질팡 할 것이 아니라 개방에 대비한 기본철학과 구도 아래 단계적 개별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