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정권' 10년 공과②] “DJ · 盧정부 정책 실망스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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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서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한 세대 만에 빈국에서, 말석이나마 선진국으로 도약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예요. 그런 나라 중 유일하게 국제무대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죠. 우리나라는 사상 유례없는 이런 국가적 위상을 지렛대로 선진국과 후진국을 잇는 막중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장하준(44)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교수는 향후 10년 한국이 추구할 만한 국가 비전으로 ‘선·후진국 간의 교량 역’을 제안했다. 그는 이런 역할을 통해 “못 살아본 기억이 없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 하는 선진국과, 경제 발전이 얼마나 좋은지 경험해 보지 못한 후진국 모두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완전한 선진국도, 완전한 후진국도 아닌 우리나라가 지금 이런 기대와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공산품 관세같이 우리에게 유리한 문제가 나오면 선진국 편에 섰다가, 농업처럼 불리한 문제가 나오면 이번엔 후진국이라고 합니다. ‘박쥐 외교’를 하는 거죠. 우리나라 지도층은 1950년대식 세계관에 얽매여 우리의 독특한 노선을 추구하기보다 미국 중심의 질서에서 어떻게 하면 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장 교수는 나아가 “앞으로 10년 동안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세계적으로 도움이 되는 나라’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덩치만 컸지 그에 걸맞은 역할을 못하고 있어요. 명색이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인데, 소득에서 해외 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0.06% 수준으로 유엔 권고치인 0.7%의 10분의 1도 안 됩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정부의 역할을 모색하는 일련의 저작을 발표해 주목받고 있는 그와 e-메일 인터뷰를 했다.

■ 미래 성장엔진 찾아내기 위한 산업정책 필요하다

■ 첨단산업 육성, 투기성 소득 억제 등에 ‘ 박정희식 ’ 정책 유용

■ 공적자금 조기회수보다 회수 최대화에 주력했어야

■ 양극화 해소 위해서도 기업 투자 활성화돼야

■ 세계화 시대에도 단기성 국제 금융자본은 규제해야

김대중(DJ) 정부 출범 이래 9년이 흘렀습니다. DJ·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 전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합니까?
“지난 9년간 우리 정부가 편 정책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성장 속도는 과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고, 소득 분배는 OECD 최하위 수준으로 악화됐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정책 방향 자체에 문제가 있었지만, 그 방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일이 많습니다.”

‘정부의 실패’로 꼽을 만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뭔가요?
“대표적으로 외환위기 후 공적자금을 투입해 국유화한 기업과 금융기관의 처리를 잘못했습니다. 국영기업은 비효율적이고 따라서 민영화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전제를 받아들이더라도, 우리 정부가 과연 민영화를 잘했느냐는 의문이에요. 국민의 혈세로 조성한 공적자금을 투입했으면 자금을 최대한 회수해야죠. 그런데 지난 9년간 우리 정부는 자금의 조기 회수에 집착해 공적자금이 들어간 기관들을 번번이 헐값에 매각했습니다. 지금 GM을 먹여살리다시피하는 대우자동차, 제일은행, 투입된 공적자금의 40%선밖에 회수할 수 없는 데도 사후 손실보전까지 약속하고 프루덴셜에 판 현대투자증권 등이 그 예입니다. 제일은행이야 위기 상황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압력으로 서둘러 매각하느라 그랬다 치더라도 다른 두 기업은 가지고 있다가 적당한 때 팔았어야 합니다.”

외국자본 우대한 것도 문제

외환은행 매각 건은 어떻게 봅니까?
“외환은행이 파산해 경제에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게 걱정됐다면 공적자금을 더 넣어 살렸어야죠. 론스타 인수 이후 외환은행 주가는 5배 뛰었습니다. 공적자금을 더 넣어 정상화시키고 나서 팔았다면 어쩌면 훨씬 더 많은 공적자금을 회수할 수 있었을 거예요. 외환은행이 불과 2년 만에 그렇게 잘나갈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죠. 론스타 측은 앞을 내다봤는데 우리 정부 관리들은 왜 그렇게 못합니까?”

론스타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관계 당국이 외국 자본을 차별했다고 보나요?
“차별은커녕 오히려 우대했습니다. 어지간한 범죄에 대해서는 피의자를 대부분 구속하는 판에, 도주는 아니더라도 증거인멸의 우려가 큰 론스타 사건 피의자들을 구속도 하지 않고 수사를 했으니까요.”

한국이 성장률 저하에, 성장 과정에서 깊어진 양극화로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잠재성장률에 가까운 성장세를 유지하면서 양극화를 해소하는 길은 없나요?
“성장률을 끌어올리려면 기업의 투자가 회복돼야 합니다. 그러자면 자본시장과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완화가 재고돼야 합니다.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도 투자가 활성화돼 기업들이 좋은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노동시장의 지나친 자유화를 되돌려 비정규직을 줄여야 돼요. 한편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도 강화해 투기적 소득을 줄여야 합니다. 나아가 복지국가의 확대를 통해 시장에 대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생기는 불평등을 줄여나가야 돼요. 물론 불평등을 현저하게 줄이려다 보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러나 불평등이 너무 심해지면 사회가 불안해지고, 이런 사회 불안은 장기적 투자 전망을 흐리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투자가 둔화되고 성장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죠.”

부동산 문제, 수급만으로 해결 안 돼

기업이 투자를 늘리도록 하기 위해 정부가 할 일은 뭔가요?
“무엇보다 자본시장 정책과 노동시장 정책을 바꿔야 합니다. 자본시장 개방과 규제완화를 재고해 기업 경영이 단기 실적주의로 흐르는 것을 막아야 돼요. 또 적대적 인수합병을 어렵게 만들어 경영권에 대한 위협을 줄여주고, 주주권을 약화시킴으로써 배당이 줄어들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금이 장기 투자 쪽으로 이동합니다. 한편 은행 규제를 개선해 기업금융을 늘려야 합니다. 노동시장의 지나친 유연화로 OECD 최고 수준이던 비정규직의 비율이 더 높아졌는데, 고용이 불안하면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소비심리가 위축되면 기업의 미래 시장 전망도 어두워집니다. 결국 투자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마련이죠.”

기업 활동에 대한 한국 정부의 규제 수준과 그 방식에 대해 어떻게 보나요?
“규제가 많아 기업활동이 위축된다고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규제가 더 많았던 과거에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기업활동이 이루어진 것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규제가 많은 중국에 수많은 기업이 투자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죠? 기업가는 규제가 많아도 미래 전망이 좋으면 투자하고, 일자리도 만들어 냅니다. 경제 전망이 어두우니까 과거엔 별로 신경 쓰지 않던 규제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거예요. 규제 개혁에 쓸 에너지를 기업의 투자의욕을 북돋우고, 기술개발을 돕고, 기업의 새로운 시장 개척을 돕는 데 써야 합니다.”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집값 폭등도 정부의 실패로 볼 수 있나요? 부동산시장과 관련한 정부의 역할은 뭔가요?
“지금 부동산 폭등은 단순히 부동산 정책만으로는 해결이 어렵습니다. 기업 투자가 위축되다 보니 유동자금이 많아졌고 이 자금이 부동산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어요. 노동시장이 불안해지고 양극화의 진전으로 계층 상승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도 큰 문제죠. 이런 상황에선 투기, 심지어 도박을 해서라도 ‘대박’을 터뜨려 미래에 대비하고 자식의 앞날까지 챙겨주려는 심리가 강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부동산 수급 정책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죠. 이래저래 기업 투자를 살리고 고용안정을 꾀하는 게 중요합니다.”

한국 경제에서 산업정책의 조절 기능이 긴요한 영역은 어디인가요? 이른바 미래의 성장엔진을 찾아내는 데도 산업정책적 접근이 필요합니까?
“과거 우리나라 산업정책은 개별 산업을 지원했습니다. 그 저변엔 우리 경제 전반‘의 미래에 대한 총체적 ‘비전’이 깔려 있었죠. 정부가 기업보다 더 잘 알아서는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기는 있었죠. 개별 기업은 자기 회사만 생각합니다. 그 결과 전체적인 안목을 지닌 정부만이 신경 쓸 수 있는 영역이 생기게 마련이죠. 기업에만 맡겨 놓았다면 오늘날 포스코가 존재하겠습니까? 통 크기로 유명한 고 정주영 현대 회장조차 조선소는 못 짓겠다고 버텼다죠. 아마 자동차 독자 모델 개발도 안 되었을 거예요. 정부가 전체적 비전을 제시하는 건 여전히 필요합니다. 이 비전을 정부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게 아니라 기업, 금융기관, 노조, 산업 전문가 등과 머리를 맞대고 같이 짜야죠. 미래의 성장엔진을 찾아내는 데도 이러한 접근이 도움이 될 겁니다.”

‘박정희식 모델’여전히 유효

박정희 정부 시대 내지는 박정희 정부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박정희 시대는 우리가 경제개발을 이뤄 빈곤에서 탈출한 시대입니다. 이런 경제발전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건강하게, 그리고 오래 살 수 없을 거예요. 논쟁거리는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그만한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겁니다. 박정희라는 개인과 그가 한 독재, 특히 유신독재가 꼭 필요했던 건 아니지만, 박정희식으로 정부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경제발전은 어려웠을 겁니다. 물론 ‘박정희식’이 성공적이었다고 해서 지금도 그대로 쓸 수는 없어요. 그러나 그 취지가 유효한 정책은 아직 많습니다. 예를 들어 유치산업 육성은 과거만큼 광범하게 필요한 건 아니지만, 아직도 첨단 산업 분야에서는 필요합니다. 다른 예로 박정희 시대에는 사회통합을 위해 사치품 소비를 규제하고 지나친 임금격차를 억제했습니다. 지금이야 이런 식으로 할 수는 없지만, 자본시장 규제를 통해 투기성 소득을 억제하고 노동시장 규제를 통해 고용불안을 해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제를 더 공평하게 만들고, 복지국가를 확대해 사회통합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른바 극소수의 재벌을 위한 독재를 했다는 박 정부 때보다 ‘참여정부’에서 사회 양극화가 더 깊어진 까닭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세계화 시대에 정부는 시장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보나요?
“세계화가 정부를 무력화시키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역설적으로 세계화 시대 정부의 역할은 더 중요해집니다. 생산요소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이동성이 적은 요소들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커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게 정부가 공급하는 교육·의료·사회간접자본 등 공공재죠. 지금 우리 경제의 문제는 개방이 덜 돼 생기는 것보다 개방이 지나쳐 생기는 게 많습니다. 단기성 국제 금융자본의 적절한 규제, 주요 기업들이 국내투자에 비해 해외투자를 지나치게 늘리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 이민 노동자의 처우 개선, 후진국 경제발전을 돕는 것, 문화진흥을 통해 세계시장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것 등이 세계화의 진전으로 우리 정부가 직면한 새로운 도전들입니다. 단적으로 기업들이 국내에 머물도록 필요한 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한편 외국으로 나갈 기업들은 빨리 나가도록 정부가 도와야 합니다.”

노무현 정부가 남은 임기 1년 동안 무엇에 주력해야 한다고 봅니까?
“국익에 어긋나는 것으로 판명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조용히 접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필재 이코노미스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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