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有核不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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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98년 러시아는 다른 나라와 달랐다. 태국.인도네시아.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러시아는 미국을 향한 수천개의 핵탄두를 갖고 있었다. 시장에서는 '유핵불사(有核不死.too nuclear to fail)'란 말이 나돌았다. 또 러시아는 경제 위기 상황인데도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경제개혁에 나설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미국과 IMF는 그해 7월 2백3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해주기로 하고, 1차로 50억달러 정도를 러시아에 줬다. 러시아의 정정 불안이 악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걱정한 샌디 버거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추가 자금을 서둘러 지원하자고 주장했다. 국무장관.국방장관.합참의장도 같은 의견이었다.

로버트 루빈 장관이 이끄는 재무부만 반대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경제개혁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돈을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IMF 구제금융이 조건없는 '공돈'으로 여겨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 유핵불사를 믿고 러시아에 무모하게 투자한 사람들이 이득을 보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문제도 심각했다.

무조건의 자금지원은 외국인 투자자 및 러시아의 과두재벌이 돈을 빼돌릴 여유만 줄 뿐 러시아의 경제회복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루빈의 생각이었다. 루빈의 반대로 돈을 받지 못한 러시아는 그해 8월 국가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했다. 많은 외국인 투자자가 큰 손해를 봤고, 미국 증시와 국제금융시장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미국 증시와 국제금융시장은 얼마 가지 않아 안정을 되찾았고, 경제개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 경제는 최근 좋아지고 있다.

무조건의 자금지원도 일면 타당성 있었지만, 보다 큰 관점에서 볼 때 자금지원을 거부했던 게 옳았다고 루빈은 회고록 '불확실한 세계'에서 술회했다. 루빈은 "나는 시장에서 자랐다"며 유핵불사 신화를 깨뜨렸다. 그는 경제발전에는 무엇보다 시장의 법칙에 입각한 경제논리를 저버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 경제의 최장(最長) 호황기를 이끈 루비노믹스(루빈의 경제학)의 요체가 시장경제 원칙이었다고 할 만하다. 이런저런 정치.사회적 이유나 일시적인 시장의 혼란을 핑계로 걸핏하면 시장경제 원칙을 외면하는 한국 경제팀에 읽어보라고 쓴 책 같다.

이세정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