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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르포] “노조 하던 사람은 사업도 잘한다는 소리 듣고 싶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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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은 훨씬 넘은 듯한 낡은 손수레가 옷보따리를 잔뜩 싣고 전태일 동상 앞을 지나가는 사이로 최신 유행 차림을 한 아가씨가 잡혔다.

월간중앙 1970년 11월13일, 그날 전태일은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활동했던 ‘동지들’이 있었다. 36년이 흐른 지금 ‘友人들’로 남은 그들의 사건 이후 삶을 추적했다.


2006년 11월 중순 서울 신당동의 소위 ‘곱창골목’으로 알려진 2차선 도로 이면 주택가. 그중 최근에 새로 개보수한 듯 깔끔하게 단장한 한 주택의 옥상에서 넥타이에 정장으로 깨끗하게 차려입은 50대 후반의 신사 다섯 명이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낡은 간이 의자에 쪼그리고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얼기설기 이어 짠 테이블 위에서는 강원도 인제에서 잡아 왔다는 민물고기 매운탕이 보글거리며 끓어올랐다.

그중 세 사람, 김영문·신진철·주현민. 바로 36년 전 산화한 전태일과 함께 고민하고, 함께 활동했으며, 함께 그날의 일을 도모했던 ‘동지들’의 모임인 삼동친목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이들이었다. 집주인을 포함한 나머지 두 사람도 이들과 청계천피복상가에서 젊은 시절을 함께했던 친구들이라고 했다.

혈서를 썼던 전태일의 동지 신진철과 최종인

이날 이들은 역시 젊은 날 청계피복상가에서 같이 고생하던 두 친구의 자녀 혼사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길일이라고 알려진 날이어서 오전 오후 두 곳의 예식장을 들러 함께 어울리고도 아쉬워 집주인의 민물매운탕 자랑을 핑계로 한잔 더 하자며 뭉쳤다는 것이었다.

이들 뒤로는 50여 개의 난초 화분이 정성스러운 손길을 탄 듯 11월임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깨끗하게 단장한 집, 난과 낚시, 그리고 여유 있는 어울림…. 집주인의 생활 수준과 취미를 알 수 있을 듯했다. 나머지 네 사람의 표정에서도 한잔 술에 불콰해진 혈색 탓인지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수많은 시민이 전태일의 뜻을 이어가고자 동판을 설치하는 것으로 후원하고 나섰다. 동판의 바보회는 삼동친목회의 전신 격인 재단사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결코 지금의 표정처럼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배를 채우기에도 급급했던 어린 시절, 피곤함에 찌든 몸을 뉘지도 못하고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옷감과 씨름하던 청계천에서의 생활, 그리고 이어진 노동운동의 처절한 순간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단지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단칸 셋방에서 먼지를 마시는 삶이 계속됐다.

이들의 그 어렵던 시절로 잠시 돌아가 보자.

1970년 11월13일 전태일의 분신이 있고 1시간쯤 뒤 어수선해진 현장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사건 현장에서는 다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예의 젊은이들이 다시 현장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 중 두 명의 젊은이가 손가락을 칼로 그어 커다란 백지 위에 혈서를 썼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시간을 단축하라’

신진철과 최종인이었다. 청년들은 그 혈서를 들고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상황은 흐지부지 정리되고, 평화시장 골목은 마치 태풍전야처럼 뭔가 알 수 없는 무거운 기운을 간직한 채 평상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혈서를 써 들고 구호를 외치던 청년들은 일단 상가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최종인과 조병섭은 출동한 경찰에 의해 중부경찰서로 연행됐다. 나머지 청년 중 일부는 밤이 이슥한 뒤에야 분신한 동료가 누워 있던 성모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친구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어야 했다. 그들 중 누구도 동지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

삼동친목회는 당시 동대문시장 내 평화시장·통일상가·동화시장의 여러 ‘공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들의 모임이었다. 이들은 전태일과 함께 평화시장 인근 상가 노동자들의 거친 삶의 실태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렸으며, 관계당국에 시정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올렸다. 그리고 그날 현장에서 세상을 향해 자신들도 사람임을 외치고자 했다. 이것이 곧 그날 사건의 발단이 됐다.

불행하게도 삼동친목회의 전모는 잊혀졌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남아 있는 자료는 당시 이들이 관계당국에 올린 진정서 말미에 적힌 몇몇의 이름뿐이다.

▶“사장의 하청 제안에 ‘나는 이미 각오를 끝냈다’고 했더니 대신 집사람을 꼬드겼어요. 신혼 때였는데 집에만 들어가면 심하게 들볶였지요. 친구들도 다시 결집했고 해서 결국 사표를 쓰고 말았지요.”

김영문 군 제대 후 노조 간여하다 1978년 지부장 맡아. 1979년 하청 시작해 2004년 사업 접고 개점 컨설턴트로 활동

대표/전태일, 서기/이민섭(이승철의 가명), 정회원/신진철 최종인 김영문 조병섭 강진환 주현민(주삼태)
이들 외에 삼동친목회원은 적게는 3명, 많게는 6명 정도가 더 있었다고 한다. 진정서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이후 청계피복노조 지부장까지 맡으며 적극적으로 활동한 임현재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2~5명의 사라진 이름들은 어디로 갔을까?

묘하게도 진정서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이후로도 청계천을 떠나지 않고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들은 가끔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결국 사라진 2~5명은 사건 직후 아예 청계천을 떠났으리라는 것이 남은 사람들의 추론이다.

또 한 사람, 강진환.

“강진환은 국립묘지에 있어요. 군에 가서 사망했다는데, 사인은 병사라고 하더군요. 그때야 군대 가서 죽었다면 죽었구나 하는 정도였지요. 강진선이라는 형님이 있는데 연락은 안 돼요.”(주현민)

삼동친목회는 전태일의 의도적인 구성이었다. 당시 청계피복공장에서 사람 쓰는 일부터 옷을 생산하는 전 과정을 맡아 하던 재단사는 사장도 무시하지 못할 존재였다. 그러니 재단사들이 힘을 모으면 자신들은 물론 어린 시다들을 보살피기에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전태일의 생각이었다.

재단사들은 실질적으로 공장장 역할을 하는 만큼 월급도 제법 많았다. 삼동친목회가 조사한 당시 재단사들의 평균 월급은 3만 원. 10년차를 넘긴 공무원 월급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으니 어렵게나마 먹고살 만했다.
“재단사로 일하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공사현장에서 막노동하고 질통 짊어지다 보면 힘에 겹고 그나마 한 달에 며칠밖에 일감이 없어요. 그러다 일하든 안 하든 월급이라고 주고 올라가기도 하니 며칠 밤을 새워도 행복했지요. 나름대로 성실해서 일도 빨리 배웠습니다. 그런데 1년쯤 지난 후 갑자기 해고당했습니다. 해고 사유요?”

임현재 씨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말을 잇는다.

“믿기지 않을 거예요. 겨울철을 맞아 혼자 며칠 밤을 새우다 너무 추워 재단보조이던 사장 처제가 자고 있는 이불 밑에 잠시 손을 넣고 녹이는데 마침 사장이 그것을 봤어요. 바로 그날 점심시간에 그만두라더군요. 재단사인 나도 하루아침에 그렇게 해고당할 정도이니 시다들은 오죽했겠습니까. 거기에 장시간 노동, 그로 인한 질병, 심지어 성노리개…. 나는 행복했지만 전태일은 그런 것을 알고 있었어요. ‘누구도 안 되고 우리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재단사인 우리가 뭉치면 해 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더군요. 의협심이 발현했죠.”

“정의롭고 순수한 사람들…운동의 한계로 작용”

전태일의 동지들은 1981년까지 10년 동안 번갈아 노조 지도부를 맡아 청계피복노조 1세대를 담당했다. 1971년 실질적으로 노조 지도부를 장악한 최종인-신진철 체제의 동지들은 1977년 노선 갈등 끝에 이승철 한 명을 남기고 모두 노조를 떠났다. 이듬해 이승철마저 지부장에서 물러나고 청계피복노조는 외부와의 연계 하에 정치투쟁을 중시하던 양승조 체제로 넘어간다.

▶“당시에도 귀족노조가 있었다면 지금까지 활동할 사람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먹고살기 힘들다 보니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 면에서 어찌 보면 우리의 사명감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진철 사건 당일 혈서 쓰고 이후 노조운동에 전념. 1977년 물러나 가게 차렸으나 부침 심해. IMF 직전 무렵에야 안정 찾아

“청계피복노조는 태일이가 죽었기 때문에 생겼으니 사회문제는 일단 보류하고 그 뜻을 이어받아 노조를 정상적으로 끌고 가는 것을 우선했지요. 그러나 외부에서는 그렇게 안 봤어요. 청계피복노조는 당시 학생이나 외부 노조의 실습장처럼 여겨졌어요. 이승철마저 노조에서 밀려나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저와 임현재·이승철 세 사람이 다시 노조로 들어갔지요. 저는 그때 막 사업을 시작했을 때인데, 그 사업마저 접었어요.”(최종인)

어렵게 이어지던 청계피복노조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철퇴를 맞는다. 청계피복노조가 도시산업선교회와 광주사태 등에 관련됐다는 이유로 1981년 해산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물론 신군부의 노조 탄압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보안사로 끌려가니 지난 10년 동안 한 일을 다 쓰라는 거예요. 5일 후 가택수색이 들어왔어요. 당시 신군부는 노조 간부들은 다 타락했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택수색 결과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3만 원짜리 집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훈방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너희는 착하고 순수한데 모이면 안 돼’ 하더라고요.”(이승철)

결국 청계피복노조는 1981년 1월24일 폐쇄됐다. 이에 항의해 이승철·임현재 등 노조 간부 9명이 농성에 들어갔으나 그것을 이유로 오히려 구속되고 만다. 이들의 구속을 끝으로 전태일의 동지들의 노조활동은 막을 내린다. 한편 청계피복노조는 이후 1984년부터 복구운동을 이어가며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사이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전태일의 동지들은 하나 둘 노조를 떠나갔다. 이들이 노조를 떠나는 계기는 크게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노조 내부의 인식 차이였다. 다른 하나는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생활의 압박이었다.

이들은 무일푼에 몸뚱어리 하나로 먹고사는 처지였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20대 초반에 결혼했다. 가장으로서 아이 한둘이 딸린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는 2만 원 안팎의 노조 전임자 월급은 가당찮은 액수였다. 그나마 상당부분은 활동비로 지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래도 사명감 하나로 버텨낼 수 있었지만 사명감에도 한계는 있었다.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해 시들어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서울 청계천7가의 평화시장 입구. 36년 전 바로 이곳에서 전태일이 자기보다 못한 ‘시다’들을 위해 몸을 불살랐다. 이후 이 거리는 한국 노동운동의 성지가 됐다.

이들 중 처음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은 조병섭이었다. 조병섭은 사건 직후 실업 상태로 있다 1971년 봄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다시 청계천으로 찾아들어 1년 정도 다시 재단사로 일하다 1976년 무점포로 남의 일을 해 주기로 하고 독립했다. 이후 약간씩 공장을 키우다 1979년쯤 가게를 열고 장사를 시작했다.
“저야 굴곡 없이 순탄하게 잘살았습니다. 큰돈은 못 벌었지만 나 먹을 만큼은 벌었어요. 세 끼 밥 먹는 거야 뭐 그리 어려울까 하는 생각이었죠.”

그렇게 살다 1997년 건강에 문제가 생겨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전북 장수군 장수읍 근처 산골에 초가집 하나를 얻어 내려갔다. 더구나 2005년에는 교통사고를 당해 아직도 몸무게가 50kg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회복이 더디다. 그렇다 보니 요즘은 무엇보다 건강 위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약이 되는 것을 몇 가지를 기르고, 유기농으로 텃밭을 가꿔 먹고 있다. 그러면서 “살아 보니 모든 것이 잠깐이더라”고 했다.

“어려운 시절, 아무도 그런 생각 안 했는데 우리가 했지요. 지금이라면 못해요. 그런데 살아 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가 잘못해서 멀쩡한 친구를 보냈으니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대신 많은 사람이 혜택 많이 받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지요.”

두 번째는 주현민이다. 주현민 역시 사건 직후 일터에서 쫓겨났다. 노조 전임자도 아니어서 알량한 월급마저 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3개월 정도 노조 사무실에서 먹고 자면서 조합원 모집 일을 거들었으나 객지생활에 당장 입에 풀칠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마침 남대문시장에 있던 친구 소개로 재단보조로 취직할 수 있었다. 결국 그쪽으로 옮겨가며 노조에서 손을 떼게 됐다.

“그렇게 4~5년을 지내다 동대문종합시장이 생기면서 맨 꼭대기 6층에서 우리 중 제일 먼저 하청공장을 시작했어요. 신사복 바지 분야에서는 실력을 인정받아 일감 걱정은 없었지요. 열여덟 살에 평화시장에 들어가 28년 동안 그 일을 했네요.”

일은 조금씩 확장돼 갔으나 젊고 총각 때여서 씀씀이가 헤펐다. 더구나 접었다 쉬고, 쉬었다 다시 하고 하니 큰돈은 모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 가르치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됐다.

“그런데 이 길이 내가 갈 길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한 번 그런 마음이 들자 일도 하기 싫고 해서 한 5년 놀다 노후 준비나 하자는 생각에서 택시를 하게 됐죠. 1994년부터 4년 정도 회사택시를 하다 1999년 6월 개인택시 번호를 샀어요.”

이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은 시기상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하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노조활동에 전념했던 나머지 다섯 사람 중 최종인(1977)-김영문(1979)-신진철(1979)-임현재(1981)도 모두 같은 길을 걷는다. 이승철은 공장을 운영하는 대신 처음부터 지퍼 장사를 시작(1984)했다.

▶전태일은 우리나라 노동운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삼동친목회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다. 2006년 11월13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묘원에서 열린 전태일의 36주기 추도식.

“악덕 기업주가 돼 ‘빡세게’ 시켜야 돈을 버는데…”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사용자의 길을 걸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졸업 학벌에 무일푼으로 청계천에 들어가 맨 몸뚱어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로지 몸을 굴려 습득한 재단 기술뿐이었다. 다른 청계천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방식 또한 다르지 않았다.

17~18세 무렵 청계천으로 들어와 처음에는 잔심부름을 하다 재단보조를 거쳐 재단사가 된다. 그러다 남의 공장 삯바느질로 시작해 하청공장을 내고 조금 안정되면 가게를 낸다. 거의 정형화된 이 모델은 청계천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미싱 일을 하던 시다들도 비슷한 길을 걷는다.

이들이 남들과 다른 것은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공장을 운영하면서 심한 마음고생을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노조 활동을 했으니 종업원들을 남들처럼 대할 수 없었다. 주위에서 보는 눈이 있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가책이 있어 바쁘면 자신이 뛰어들어 밤을 새울망정 종업원들에게는 최소한 자신들이 요구했던 조건으로 일을 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들 누구 하나 예외없이 똑같은 심정을 피력했다.

양심을 가리기 위해 마스크 쓰고 다닌 1년여 세월

“내가 못 쓰더라도 월급만큼은 제대로 주자, 자취하는 애들 밥은 굶기지 말자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남들 객공(수당으로 지급하는 경우) 쓸 때도 우리는 월급 주고, 남들 야근 시켜도 우리는 일찍 끝내고 내가 대신 밤을 새우고는 했죠.”(주현민)

“돈을 벌려면 악덕 기업주가 돼서 ‘빡세게’ 일을 시켜야 하는데, 수당 제대로 주고 제때 쉬게 해 주면서도 남들이 어떻게 볼까 항상 염려했어요. 저는 결국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공장을 접었어요. 그것을 역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이지요.”(임현재)

▶“당시 우리는 깡패로 불릴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노조 하던 사람은 사업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죠. 그래서 늘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고, 정말 올바르게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최종인 1977년 청계노조 지부장에서 물러나 80년대에 의류사업으로 성공. 이후 출판사, 의류판매업 거쳐 무역업에 종사

다행인 것은 이들이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제는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만큼 성공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노조를 하면서 길러진 정신력과 인간적 품성이었다.

“청계지부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다 밥은 먹고 살아요. 그만큼 독했기 때문이지요. 지나온 과정에서 고생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 후의 고생은 고생도 아니다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다 어려웠으니 특별히 더 어렵다는 생각조차 안 했지요.”(신진철)

“당시 우리는 깡패로 불릴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노조 하던 사람은 사업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죠. 그래서 늘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고, 정말 올바르게 살았다고 자부합니다.”(최종인)

노조 지부장을 역임하다 1977년 노선투쟁에서 밀려 이승철을 제외한 친구들과 함께 노조에서 물러난 최종인은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장인의 도움을 받아 생선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생전 처음 만져 보는 생선 비린내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경험을 쌓을 틈도 없이 1년 만에 밑천까지 다 까먹고 거리로 나앉을 판이 됐다.

결국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겠다며 떠나온 청계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후배들의 도움으로 중부시장에서 하청공장을 시작했다. 하지만 양심이라는 것이 가슴살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1년 정도 아무도 모르게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 날 청계천 친구들이 찾아왔다. 다시 노조 지부장을 맡으라는 반 강요였다. 그러잖아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자신이 부끄럽던 차였다. 곧 사업을 접고 노조에 합류했다. 그러나 한때나마 사업주였던 신분 때문에 6개월 만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식구는 벌써 네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갈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다시 이리저리 돈을 모아 신평화시장 2층에 가게를 냈다. 오로지 하나뿐인 길에서는 곁눈질할 틈조차 없었다. 그러자 돈이 눈에 보였다. 부산에서 제일 장사 잘하는 사람을 찾아가 원가에서 100원을 남기고 물건을 넘길 테니 거래를 트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소문나자 지방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그 뒤로는 만드는 것마다 히트를 하며 짧은 기간에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청계천 인근 광희동에 5층짜리 건물까지 매입할 수 있었다.

1991년 최종인은 잘나가던 사업을 하루아침에 접어버렸다. 그 잘난 양심이 또 비집고 나왔던 것이다. 공장에서 행여 사고라도 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 것인지 염려되고는 하던 참이었다. 이후 전태일의 매제와 함께 출판사를 시작했다. 출판사는 좋은 뜻을 가지고 2년 동안 유지했으나 돈 한 푼 만져보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1993년 다시 의류 판매사업에 뛰어들었다.

“실패했지요. 그 후로는 하는 것마다 다 망했어요. 그러다 1996년 음식을 잘못 먹고 거의 죽었다 살아났지요. 친구들이 장지까지 물색했다니까요. 그러니 지금의 저는 5~10% 짜리 인생이지요.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1998년부터 조카사위를 내세워 무역업을 하고 있지만 직접 간여하지는 않아요.”

그러면서도 죽기 전에 전태일과 관련해 뭔가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하여 찾고 있다. 그 하나가 전태일장학재단사업이다. 다만 세월이 가면서 그런 마음이 자꾸 퇴색하는 것 아닌지 우려된다고 한다.

사건 직후 후배 한 명과 함께 창동으로 가 이소선 여사를 모시고 병원으로 갔던 김영문. 그는 노조가 창립된 직후인 1971년 4월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다시 청계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운영위원·감사 등으로 노조에서 활동하다 1978년 지부장으로 나선다.

▶“하도 억울해 다시 노조에 들어가 2년여 동안 노력했는데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더군요. 어느 길에 서야 하나 많은 고민 끝에 모든 것을 접고 새로운 길을 가기로 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장사를 시작했지요.”

이승철 1981년 노조 해산에 항의농성하다 옥살이. 출옥 후 다시 노조에 들어가 활동하다 1984년 지퍼 장사 시작

“노조 지부장을 맡게 되면서 이제까지와 달리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각오를 다졌지요. 그런데 바로 그 무렵 사장이 좋은 조건으로 하청을 맡아 달라고 제안했어요. 성실하게 일해 준 덕분이었겠지요.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미 각오를 끝냈다’고 했더니 대신 집사람을 꼬드기더라고요. 신혼 때였는데 집에만 들어가면 심하게 들볶였어요. 친구들도 다시 결집됐고 친구들이 있으니까 하는 마음에서 1년 조금 넘게 하다 결국 사표를 쓰고 말았지요.”

1979년 김영문은 중고 기계를 구입해 하청공장을 차렸다. 마침 우리 경제가 한창 잘 돌아갈 때였다. 그러나 노조 지부장 출신답게 공장을 운영하다 보니 돈이 벌리지 않았다. 공장으로는 승산이 없겠다 싶어 1981년 무렵 친구의 가게 반쪽을 빌려 가게를 열었다.

3년 뒤 남대문시장으로 진출해 10년 정도 아동복을 하다 1998년 두타 쇼핑몰이 들어설 때 분양업무를 맡아보면서 가게를 얻어 청계천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2004년 무렵 부인의 몸이 안 좋아지면서 접고 말았다. 지금은 건설 중인 패션시티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입점 준비를 해 주는 일종의 개점 컨설턴트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은 다시 무일푼이 됐어요. 회룡역 근처의 집 한 채와 승용차 한 대 굴리는 정도지요. 돈이라는 것이 한이 없는 것 같아요. 어디까지 추구해야 하는지…. 머잖아 아들 결혼시켜야 하는데, 전세라도 얻어 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 한밤중에도 잠에서 깨요.”

가마니 두 장 넓이의 신접살림방

사건 당일 현장에서 혈서를 썼던 신진철은 1977년 무렵 노선투쟁에서 밀려 모두 그만둘 때까지 중심적인 노조 전임자로 활동했다. 1년 전에 결혼해 창신동에 있던 부인의 사촌오빠 집에 세들어 1평도 채 안 되는 방에 살림을 차린 상태였다. 막상 노조에서 나오니 밥 먹을 일이 급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하청공장을 차릴 처지조차 못 됐다.

빚을 얻어 가마니 두 장 넓이의 신접살림방에 미싱과 ‘오바로꾸(감치기)’ 기계를 들여놓고 가게 하는 친구들 일감을 받아다 삯바느질을 했다. 낮에는 미싱을 벌여 놓고 일하다 밤이 되면 미싱과 벽 사이에 끼어 새우잠을 자는 신세였다. 그렇게 한 3년 하다 보니 기계도 제법 늘어나고 일하는 사람도 늘었으나 그놈의 잘난 경력이 문제였다. 시도 때도 없이 문득 문득 밀려오는 죄책감에 그때마다 심한 체기에 시달려야 했다.

▶“어려울 때도 물러나지 못했던 것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책임이었습니다. 많은 실수가 있었겠지만, 어려운 시기에 변절하지 않고 후회 없이 잘살았다 싶습니다. 지금과 같은 균형감각도 갖추게 되고.”

임현재 해산 당시 청계노조 지부장. 항의농성으로 옥살이 후 1981년 공장 차려. 1997년 청계상가 근처에서 보험 대리점 시작

결국 공장을 접고 빚을 얻어 신평화시장에 가게를 차렸다. 그러나 채 몇 달도 견디지 못하고 모두 들어먹고 무일푼 신세가 됐다. 어차피 내친걸음, 다른 길은 없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친척들에게 돈을 더 빌려 남대문시장으로 진출해 점포를 얻었다.

뜻밖에도 이번에는 행운이 찾아오는 듯했다. 그해 장사를 엄청나게 잘해 빚을 갚고도 제법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욕심과 자만심이라는 나쁜 친구가 찾아들었다. 추석을 맞아 눈여겨보았던 한 아이템에 작심하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동료 상인들조차 놀랄 정도로 엄청나게 손실을 봤다. 게다가 나쁜 것은 항상 혼자 오지 않았다. 한 번 망하는 길로 들어서자 깔아 놓았던 외상값은 물론 남의 외상값까지 온통 혼자 뒤집어쓰게 됐다.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나고 얼마 후의 일이었다.

이 무렵 친구들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신진철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도무지 만날 수 없고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무려 10여 년을 그는 사라진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친구들을 만나도 술 한잔 살 수 없는 처지이니 멀리 길에서 친구라도 보일라치면 얼른 옆 골목으로 돌아가야 했던 시절이었다.

“1997년 IMF 직전에야 겨우 안정을 찾기 시작했죠. 그때의 손실을 회복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린 셈입니다. 그해 일산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생활이 펴질 만하자 또 다른 악재가 길을 막고 나섰다. 이미 시장은 그에게 더 이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있었다.

“배운 것 없고 나이를 먹다 보니 감이 떨어지고, 그렇다 보니 유행에 민감하지 못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더라고요. 우리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돼야 옷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유행하는 옷이 그게 무슨 옷입니까? 이런 생각이었으니 유행에 민감하지 못할 수밖에요. 결국 2003년에 그만뒀지요. 이후 세탁소도 해 보고, 건물 경비도 해 보고…. 지역신문 등을 통해 열심히 다른 일을 구해 봤지만 다시는 안 되더군요.”

임현재는 1970년 10월 하순 폭행사건으로 40여 일 동안 유치장 신세를 지느라 전태일의 분신이나 노조 설립 등의 일을 직접 겪지 못했다.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다 할머니와 충돌했는데 경찰이 길바닥에 쓰러진 할머니의 일방적 주장만 받아들여 결국 폭행으로 몰리고 말았던 것. 그 대신 노조 일은 누구보다 열성으로 치러 나갔다.

노조 해산 당시 지부장이었던 임현재는 항의 농성을 하다 이승철과 1년여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때 부인이 애 둘을 데리고 면회를 왔는데 먹고사는 일이 힘에 부쳤는지 그 모습이 참으로 참담했다. 가슴이 울컥했다.

“정의도 좋지만 가족 먹여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차라리 외면해 버리자 마음은 편했어요. 처음에는 차마 공장은 못하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1981년 무렵 장사를 시작했으나 어려워 결국 하청공장을 만들었지요. 3년 뒤 남대문시장으로 옮겨 다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 화장실 근처에 가게를 얻었는데 장사도 잘 안 되고 손님도 ‘진상’들만 들어요. 그래도 한 3년 고생하고 나니 앞쪽 점포 얻을 만큼 모이더군요.”

목이 좋으니 값을 더 받아도 물건은 더 잘 나갔다. 그때부터 비로소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돼 점포도 구입할 정도가 됐다. 그러다 1995년 무렵 가게를 정리했다. 사람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너무 잘 대해 준 것이 화근이었다.

“지금의 직장에 와서 보니 사용자나 노동자나 모두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에요. 사용자는 잘 대우해 주면서도 흑자를 내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노동자는 적정한 보수를 받는 대가로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해요. 주인 눈이 없어도 꾀를 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태도도 교육을 통해 가능할 듯싶어요. 그러려면 평생 재교육이 필요하지요. 지금의 노조들은 헤게모니 투쟁에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있는 것 아닌가 해요. 영세공장들의 경우 견디다 못해 그만두거나 이전하면 그만이잖아요. 유토피아는 어차피 이상향 아닌가요? 공장이 평화시장을 떠나면 노동자도 더 이상 갈 데가 없잖아요. 노조에서도 이런 생각이 무시돼 던지고 나왔지만 지금도 누군가 이에 대해 토론하자고 하면 하겠어요.”

공장을 아예 재단사에게 물려주고 나니 1억 원짜리 집과 9,000만 원 정도를 남길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정도면 다른 사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게를 정리하며 받을 것 못 받고 줄 것 다 주고 나니 남는 것이 없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먹고살겠다 싶어 1997년 보험 대리점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업종은 인맥이 중요해요. 인맥 중 학맥이 가장 좋은데, 저는 그게 없잖아요. 그나마 아는 사람들은 보험조차 들 형편이 안 되고…. 그래도 이 즈음에는 한 해 약 5,000만~6,000만 원 정도 버는데 올해 목표는 조금 높여 잡았어요. 성급하게 가게를 접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는 후회도 있지요.”

이승철은 임현재와 함께 노조 강제 해산에 항의하는 농성을 하다 구속돼 1981년 7월13일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나름으로는 합리적으로 한다고 했는데도 이렇게 되고 보니 울화가 치밀어 새롭게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해 보겠다는 생각에서 출옥 후 다시 평화시장에 재단사로 재취직했다.

“그 뒤 2년여 동안 노력했는데 현실적으로 도저히 두 아이 키우며 먹고살 수 없더군요. 어느 길에 서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지요. 결국 모든 것을 접고 새로운 길을 가기로 했어요.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을 고용해야 하는 공장은 피하고 싶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퍼 장사를 시작했지요.”

1977년 3월 결혼 이후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3만 원짜리 집에 살며 됫박쌀을 사다 먹었는데, 부인이 월급 절반을 떼어 계를 붓고 해서 1,200만 원을 모았더라고. 이것으로 1984년 초 조그만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몇 달 후 청계노조 복구 움직임이 일면서 민통련에 있던 장기표 씨가 찾아와 노조 사무국장을 맡으라고 했다.

▶“재단 일이 내가 갈 길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러자 일도 하기 싫고 해서 한 5년 놀다 노후 준비나 하자는 생각에서 택시를 하게 됐죠. 회사택시를 하다 1999년 개인택시 번호를 샀어요.”

주현민 노조 일 하다 재단보조로 취직. 신사복 바지 하청공장 운영. 쉬다 일하다를 반복하다 1994년 택시기사로 전업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두 달 전에 시작한 장사를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결국 평범한 인생으로 돌아가자 결심하고 노조 복귀를 포기했다. 이후 친척들의 도움도 받고 88올림픽 등 시대의 도움도 받으며 근근이 유지했는데, 그런 상태가 무려 15년 가까이 됐다. 그러다 대박을 터뜨린 것이 남들 다 어렵다고 하던 IMF 때였다.

“IMF가 터지자 10만 원대 청바지시장이 무너지고 3만 원대 중저가 청바지가 먹히기 시작하면서 동대문시장은 오히려 활기를 띠었어요. 그러자 잠뱅이·마루 등 중저가 청바지를 만들어 팔던 후배들의 브랜드가 뜨면서 지퍼를 대량 주문했어요. 그전에 1년치 매출을 한 달에 올릴 정도였죠.”

“너희는 너희가 챙겨라 식 귀족노조 문제 많아”

1999년에는 YKK 본사가 먼저 대리점 할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해서 계약하고 2000년 법인으로 전환해 지금은 연매출 30억 원에 순익 3억 원 정도를 올린단다.

“장사를 하면서도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다 보니 TV를 보다 관련 뉴스라도 나오면 소리를 지르며 마치 노동운동하는 사람처럼 생각했어요. 그러나 1992년 후두에 혹이 생기고 이듬해에는 뇌출혈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몸이 많이 나빠졌지요. 혈압약·위염약을 달고 살지요. 나도 조금 편하게 지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등산하러 다니면서 외면하려고 노력했죠. 이제는 많이 초연해졌어요. 제3자의 입장에서 순해졌다고나 할까?”

그만큼 그는 이제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변했다. 경영 공부도 할 겸 공부 자체에 대한 욕심도 지울 겸 해서 2004년 성균관대 최고경영자과정에 나가게 된 것도 시각 교정에 많은 참고가 됐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빈부격차가 있게 마련입니다. 벌어지면 안 되지만. 못사는 개인에게도 문제는 있습니다. 낭비가 심하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거든요. 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도 문제예요. 노조가 많이 변한 것 같아요. 하청업체 직원들에게는 구조적으로 얽힌 문제가 있는데, 이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요. 너희는 너희가 챙겨라 하는 식이잖아요.”

이제는 다들 먹고살 만해서일까? 아니면 인식의 변화일까? 다른 이들 역시 노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발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조병섭은 인터뷰 말미에 “나 할 말은 꼭 한마디 있네” 하더니 “연봉 억대 되는 사람들이 왜 노조를 해요. 자기들만 잘살면 뭐 해요. 열 받을 때가 있어요. 진짜 배가 고파 노동운동을 하고 농성하면 이해할 수 있지만, 하청업체나 비정규직 노조에 대해서는 ‘능력껏 먹는다’ 이런 사람이 노조를 해서는 안 돼요. 밥그릇 열 개 가진 사람이 한 개 가진 사람 것까지 다 가져가려고 하니 문제”라며 소리를 높였다.

신진철의 쓴소리도 의미심장하다.

“혈서 쓰기 위해 그었던 자국 아직도 남아”

“당시에도 귀족노조가 있었다면 지금까지 할 사람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먹고살기 힘들다 보니 나왔지요. 그런 면에서 어찌 보면 우리의 사명감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이들은 ‘청계한울타리’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삼동회원을 포함해 당시 청계천에서 일하던 30여 명의 친구가 참석한다. 30여 년이 훌쩍 넘어 다시 옛정을 찾은 삼동회원들의 회고는 어떠할까?

“어려울 때도 물러나지 못했던 것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책임이었습니다. 많은 실수가 있었겠지만, 어려운 시기에 변절하지 않고 잘 살았다 싶습니다. 제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입니다. 그래도 지금과 같은 균형감각을 갖게 된 것도 모두 노동운동을 통해 수많은 스승을 만난 덕분입니다. 후회 없이 잘 살았습니다.”(임현재)

이들의 간단치 않았던 생활, 파란만장했던 삶을 짧은 몇 줄의 글로 줄이기에는 이들이 한 말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이들은 전태일의 동지로서 그의 뜻을 받들기 위해 자기 한 몸을 던져 노동운동에 매진했으며, 가장으로서 한 가정의 행복을 위해 힘들여 자신의 뜻과 어긋나는 길을 걷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누구보다 태연하다.

이들의 이력은 한 시대의 역사로 기억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들이 이끌었던 청계노조의 1970년대는 누구도 그렇다고 말하지 못할 때 억눌려 있던 우리 사회 민중의 삶을 일깨운 불씨였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도 한사코 자신들의 삶을 부끄러워한다.

“노조 행사에 나가면 늘 ‘친구 대표’로서 한마디 하라고 하는데, 인제 와서 우리가 노동운동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지요. 항상 노동운동을 계속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습니다.”(최종인)
이들은 아직도 그날의 아픈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에 그랬듯 지금도 자신들보다 이름 없는 많은 ‘시다’들을 먼저 기억한다.

“지금도 손을 비비다 보면 손끝에서 당시 혈서를 쓰기 위해 그었던 자국이 느껴집니다. 그럴 때마다 당시의 일들이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이룬 것이 있다면 거론되는 몇몇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기억나지 않는 많은 사람의 총체적 노력 덕분입니다. 그러므로 몇몇 사람만 거론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은 늘 따로 있지요.”(신진철)

동대문운동장 인근 패션단지의 평화시장 골목으로 이어지는 곳에 가로놓인 다리. 그 중간쯤에 은색 상반신 동상이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동상 뒤 인도 위에는 한글과 영문으로 동상의 내력을 기록한 검은색 판석이 깔려 있다. 판석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부활의 신화를 창조한 청계피복노동조합 1970년 11월13일 이 다리 앞의 평화시장 앞길에서….”

전태일이었다. 자신의 몸을 불살라 우리나라 민주노동운동의 불씨로 삼은 전태일. 그는 이제 우리나라 노동운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그날 전태일은 혼자가 아니었다. 사건 현장에 있던 그 또래의 청년 십수 명은 오늘 제각각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단 하나 전태일의 의로운 정신을 잊지 못한다.

[이항복_월간중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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