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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도 좀 먹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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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물론 연휴를 이용해 가족끼리 여행을 가는 집들도 많이 늘어났고, 미루고 미뤘던 대청소를 하는 집들도 있고, 힘들게 음식 장만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는 대신 가족끼리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하는 집들도 있다. 그러나 연휴를 이렇게 보내든, 저렇게 보내든, 주부들은 바빠지게 마련이다. 남편과 아이들을 챙기고, 시댁 식구들에서부터 친정 식구들까지 챙겨야 하니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덩달아 바빠진다. 그러다 보면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또 주부들이 아닐까.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나와는 절친하게 지내는 여자 선배가 있는데 연초에 만나 저녁 식사를 하게 됐다. 그 선배와 나는 모 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다. 그녀는 아나운서로 그 프로그램의 진행자였고 나는 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손님으로 초대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 뒤로 그녀와 나는 일 년 남짓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녀와 나는 주부로 살면서 자신의 일을 병행한다는 것, 일과 육아, 둘 모두 잘해나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 서로에게 털어놓곤 했다.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아이들에게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닌지, 아이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얘기에서부터, 바쁘다 보니 봄이 되었는데도 옷 정리를 못해서 아이들에게 겨울옷 입고 다니게 하는 일도 많다, 아이들 학교에도 한번 제대로 가보지 못 한다, 어렸을 때 엄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야 되는데 우리 애들은 내가 책 한 번 제대로 읽어주지 못했다, 등 등 마음속의 그늘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은 만나자마자 그녀가 울컥, 눈물부터 내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언니! 설 연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왜 울어?" 내가 휴지를 건네주자 그녀는 내가 건네준 휴지로 코를 팽, 풀더니 이번엔 또 활짝 웃는 것이었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잖아." "뭐야, 내일 모레면 마흔 되는 여자가 엄마 생각난다고 울어?" 내가 묻자 그녀는 또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명랑아! 너, 이번 설날에 네가 좋아하는 음식은 먹었어? 네 남편, 네 아이들 설빔 말고 네 옷은 한 벌이라도 샀어? 양말이라도 한 켤레 네 몫으로 샀니?" "음식? 음식이야 많이 먹었지 뭐. 전이다 뭐다 먹느라고 바빴지. 옷은 뭐, 누가 요새 설날이라고 옷 사나."

그녀의 말에 나는 그렇게 얼버무려야 했다. 설날이나 추석.명절이 되면 손님 맞을 준비에서부터 평소에 잘 찾아뵙지 못했던 지인들께 안부 인사를 전하는 일까지 챙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나를 위한 옷을 사는 일 같은 것은 생각할 엄두도 나지 않는 것이다.

"있잖아. 우리 엄마가 나한테 그러더라. 연휴 마지막 날 친정 엄마네 갔더니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 거야. 내가 우리 딸애 옆에 붙어 앉아서 이것저것 입에 넣어주기 바쁘니까 우리 엄마가 나한테 그러시더라. 야! 네 딸만 먹이지 말고 내 딸도 좀 먹여라. 그러시면서 내 입에 밥을 떠 넣어주시더라고." 그러면서 그녀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참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고. 자신이 누군가에게는 참 소중한 딸이라는 사실을.

그 뒤로 나는 설날이 되면 그녀의 말을 떠올린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나라는 사람은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며 딸이라는 사실을 아주 가끔씩이라도 떠올리면서 한 해를 보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한 해를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한 한 해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명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