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누가 '도덕'을 독점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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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무현 대통령에겐 일종의 도덕적 결벽성이 있다고 한다. 측근의 11억원 비리 혐의로 "눈앞이 캄캄했다"면서 국정을 수행할 도덕적 신뢰의 밑천에 적신호가 왔다고 했던 盧대통령이었다. 그는 "주변에 허물이 없고 금전적 부정이 없는 대통령이기를, 심각한 허물이 발견되면 사임할 줄 아는 양심을 보여주는 대통령이기를 원했다"는 말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도덕성을 중시하는 盧대통령인데 만일 검찰 수사에서 여당과 측근의 비리 혐의가 더 드러나면 어떻게 처신할까. 11억원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하고 국민 볼 낯이 없다고 했는데 만일 11억원이 15억원이 되거나 10억원대, 백억원대의 불법 선거자금이 나올 경우 앞이 보이겠는가. 그럴 경우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는가. 실제 수사 결과 최도술씨의 혐의는 점점 커지고 있다. 또 민주당 대선자금 수사에서도 차명계좌가 발견되고 대기업에서 받은 돈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혐의가 더 크게 번진다면 盧대통령은 어떤 결심을 할까. 그럴 경우 국정은 어떻게 될까.

*** 盧대통령이 활기 되찾은 까닭

이처럼 지금 대선자금 수사는 盧대통령에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야당 쪽의 비리는 충격이 크더라도 사법처리하면 되지만 현직 대통령의 경우 문제가 달라진다. 그러나 이런 걱정과는 달리 요즘 盧대통령은 활기를 되찾은 것 같다. 한달 전 재신임을 묻겠다고 하던 침통한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다. 자기의 후원자인 재력가와 부부동반 골프도 치고, 술 사주고 밥 사주면 안 된다던 신문사 사람들에게 술.밥을 대접하기도 했다. 여야 의원들을 잇따라 초청해 국정설명을 하기도 한다.

무엇이 盧대통령에게 다시 활기를 불어넣었을까.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라는 관측이 많다. 측근의 11억원으로 궁지에 몰렸다가 한나라당의 1백억원으로 국면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어 대선자금 전면수사 제기로 청와대가 주도권을 잡았다고 한다. 盧대통령은 대선자금에 관해 자기는 깨끗하다고 한 적이 없지만 여야가 규모에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11억원과 1백억원의 차이, 대선자금의 규모 차이가 盧대통령에게 새로운 '밑천'이 된 것일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야당에서 1백억원짜리가 나왔다고 해서 측근의 11억원짜리가 없어진 건 아니다. 눈앞이 캄캄하게 된 요인은 그대로인 것이다. 또 가령 앞으로 불법 대선자금이 한쪽은 1백억원, 다른쪽은 5백억원으로 드러났다고 치자. 5백억원은 분명 불법이고 부도덕이다. 그렇다고 1백억원은 착하고 옳은 것인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기 때문에 여론의 동정을 받고 벌이 다소 가벼워질 수는 있겠지만 1백억원도 불법.부도덕이긴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이런 규모 차이가 도덕성에 민감하다는 盧대통령에게 '밑천'이 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도덕적 밑천'이 남의 잘못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자금확보 경쟁이 치열한 대선정국에서 적은 돈을 받았다고 더 도덕적이고, 더 큰돈을 받았다고 부도덕이라는 건 비논리적이다. 정치판에서 돈은 힘있는 쪽에 더 쏠리게 마련이다. 돈의 많고 적음이 받는 쪽의 도덕지수(指數)를 말해주는 게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도 실제 지지율(힘)에 따라 돈이 쏠리는 경향이었다.

*** '나만 깨끗하다'는 위선 버려야

과거부터 정치권에서는 부패의 본질은 같으면서도 자기만이 깨끗한 척하는 도덕성 독점 또는 도덕성 과시 같은 위선이 끊임없이 있었다. 집권세력은 으레 개혁.도덕세력이 되고 비판세력은 수구.비도덕으로 몰렸다. YS는 집권 초 자기는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는 정치권을 향해 "통회(痛悔)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없다"고 질타했다. DJ 역시 정치개혁과 깨끗한 정치를 역설했다. 부패한 정치판에서 9단에까지 오른 사람들이 집권하자 하루아침에 자기는 성자라도 된 것처럼 남을 향해 도덕과 개혁을 외쳤지만 오래잖아 측근 비리.아들 비리로 참담한 결과를 남겼다.

우리 정계에서 아직까지는 누구도 도덕성을 독점하려 해선 안 된다. 대선자금 수사도 여야의 도덕성 게임이 아니다. 진상규명 결과에 따라 양쪽 모두 겸손하게 법적.도덕적 책임을 지고 인적쇄신.제도개혁으로 가는 길뿐이다.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