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방장관 김성은씨|중국교포 선교사업에 분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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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5·16후 군사혁명 과도내각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입각, 민정이양 후 3공전반기까지 5년(63년3월∼68년2월) 동안 최장수 국방부장관을 지낸 김성은씨(67).
재임시절인 64년9월 국군이동외과병원 등 비 전투 의료 지원단을 월남에 파병함으로써 이후 청룡·맹호·백마부대 등 전투부대가 본격적으로 월남전에 뛰어들게되는 월남전 파병 실무를 책임졌던 증인이기도 하다.
70년 대통령안보담당특별보좌관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났던 그는 요즈음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복음 전도자로 변신,「주전론자」로 비춰졌던 예전의 강성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평화의 신앙인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요즘 중국교포의 선교지원활동 등「북방선교」에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순전히 우연한 기회였어요. 89년 초 중국교포의 고국방문단에 제 사촌 누님(68)이 끼어있어 45년 만주에서 헤어진 뒤 처음으로 만났지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탓에 누님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고있으면서도 종교에 대한 열정은 남아있었어요.
제가 장로로 있는 약수동 신일 장로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보곤 했습니다. 체류기한 3개월이 지나 중국으로 되돌아가는 누님에게 우리(교회)는 그곳에서의 선교활동을 적극 지원키로 약속하고 일단 성경책 1백권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해서「북방선교」에 발을 딛게 됐습니다.
-정식 국교관계가 없는 상태라서 공개적인 지원활동이 어려웠을텐데요.
▲중국을 방문하는 우리실업가·재미교포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설교 테이프와 필요 경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담한 교회까지 갖추고 비공개 신자만도 5백여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오는 7월께 조사단을 파견해 그곳 선교 실정을 파악한 뒤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벌일 계획입니다.
-만주 등 중국에 중점적으로 선교사업을 벌이고 계시는데 누님이 있는 곳이라는 이유 외에도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중국 동북부는 북한과 인적왕래 등 직접교류가 가장 빈번히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즉 중국교포의 선교를 통해 기독교사상이 북한으로 흘러들어 갈 수 있다는 점을 노린거죠. 물론 이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촉매제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고요.
또 개인적으로는 14세 때 단신으로 만주로 건너가 대학(하얼빈 농대)까지 다니다 해방 된 해에 귀국했기에 남다른 향수를 느끼는 곳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 입신하게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 듯 한데요.
▲「성은」이란 이름이 말해주듯 원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나 공직생활 중에는 그야말로 습관적인 신자에 지나지 않았지요.
46세란 비교적 젊은 나이에 관직에서 떠나게돼 한때 갑자기 달라진 주변환경에 적응치 못하고 삶의 허탈감에 빠졌지요. 설상가상으로 담석증이 겹쳐 투병생활까지 하다보니 심신이 모두 극히 무기력한 상태였습니다.
마침내 의지할 곳이라곤 신앙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끝없이 기도하고 회개하다보니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제 몸 속에 성령이 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됐습니다.
화제가 수서 비리·대구 페놀오염 등 사회문제에 이르자 김씨는『정부가 돌에 부딪쳐 넘어진 뒤에야 아프다는 것을 알만큼 미련해요』라며 강한 톤으로 정부를 비판하고『우리세대였던 60, 70년대의 무분별한 개발 우선 정책에서 탈피, 국민공동체 전체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쪽으로 사고의 전환이 절실한 때』라고 강조했다.
『6·25때 유엔이 우릴 도왔습니다. 이번 걸프전도 유엔결의에서 나온 만큼 수혜자로서 우리는 전투병력을 파견했어야 했어요. 그래야만 우리의 안보상황이 다급해질 때 유엔의 도움을 자신 있게 구할 수 있지 않겠어요.』
김씨는 사회가 민주화되고 통일열기가 뜨거워지더라도「안보상황」만은 결코 가볍게 보지 말아 달라며 파병주역의 전 국방장관다운 부탁을 잊지 않았다. 5남1녀를 다 분가시켜 내보내고 부인과 두 식구가 서울 성북동 대지 3백평의 넓은 집을 지키고 산다. <고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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