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16. 신랑 돌아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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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58년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가을·겨울 패션쇼에서 국내 최초로 선보인 블루존(blouson) 스타일의 투피스·블루존 스타일은 기존의 여성복과는 달리 재킷의 허리 부분을 약간 풍성하게 해 ‘여성의 허리를 해방시킨 디자인’으로 불린다. 52년 프랑스의 한 패션쇼에서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처음소개했다. 국내에서 이 스타일은 여배우들에게 특히 인기였고, 사진 속 모델은 당시 인기 영화배우인 문애란씨다.

1946년 5월 어느 날 늦은 저녁,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온 집안이 떠들썩해졌다.

"작은 형부가 돌아왔어요!" 그가 돌아온 것이다. 부모님과 동생들, 식구 모두가 현관으로 달려가는데 웬일인지 내 발걸음은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목욕탕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할머니가 나를 보고 "얘! 행여 눈치 보이지 말거라"라고 한마디 하시더니 현관으로 뛰어가셨다.

현관 앞에 서 있는 그는 깡마르고 초췌해 보였다. 명랑하던 표정도 사라졌다. 애수에 젖은 듯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니, 내가 그리도 살려 달라고 빌고 빌던 내 사람이 맞는가 싶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마치 나와는 아무 인연도 없었던 것처럼.

아버지와 술을 몇 잔 나눈 뒤 늦은 밤 우리는 이층 내 방으로 올라갔다.

"당신이 살아 돌아와서 너무나 기뻐요."

"고맙소."

나의 깍듯한 인사에 그 역시 짤막하게 고마움을 표시했으나 우리 사이를 서먹서먹하게 만드는 싸늘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랜 침묵 끝에 마침내 그가 그동안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했을 때 나는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소. 그러나 가까스로 살아나 산속에 숨어 지내며 게릴라 전을 계속했소. 그러다 부상을 당해 어느 일본 여인에게 구조되었소. 그리고는… 그 여인의 집에 은신하며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살았었소. 그런데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들이 조선인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지 않겠소. 그 소문을 듣고 나는 용기를 냈소.

같이 살던 일본 여인은 "이제 당신을 아키코상(나의 일본식 이름)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며 나를 보내주었소…."

그 후 그는 미군의 군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밀린 월급을 받아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곡절많은 남편의 사연을 들으면서도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오로지 시부모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가 머릿 속에서 맴돌 뿐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해주 시댁에서 온 열 일곱 장짜리 문제의 그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 장 한 장 넘기며 천천히 읽어나갔다. 다 읽고 나서 크게 한숨을 쉬곤 가만히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만 고생한 줄 알았더니 그동안 당신도 많은 고생을 한 것 같군." 그는 조용히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이부자리를 구석으로 끌고 가 그대로 누웠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고, 또다시 밤이 왔지만 우리 부부는 침묵 속에 이틀을 보냈다. 사흘째 되던 날 그는 "부모님께 가봐야겠소"라고 말하더니 옷을 차려 입고 집을 나섰다.

노라·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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