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극빈층 무상 의료를 없앤다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정부가 최근 극빈층 대상 무상 의료 제도를 사실상 폐지하는 의료급여법 시행령 개정안을 발표했다. 주 내용은 극빈층이 외래진료를 받을 때 동네 의원에는 1000원, 대학병원에는 2000원을 내야 하며(소액 본인부담제), 이 비용을 일부 보조하기 위해 월 6000원을 계좌에 입금해 준다는 것이다(건강생활유지비). 희귀성 질환자나 만성질환자가 의원을 선택해 집중 관리를 받으면 진료비를 면제하는 방안(선택 병원제)도 포함돼 있다.

의료급여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와 그 위 저소득층 일부에 세금으로 의료를 지원하는 제도다. 복지 확대 정책에 따라 의료급여 예산이 매년 크게 증가하고, 의료 이용 통제 장치가 없다 보니 지원 대상자 한 사람이 쓰는 진료비가 건강보험 가입자보다 3.3배나 높다. 그동안 극빈층의 도덕적 해이와 재정 급증에 손을 놓고 있던 정부가 관심을 보인 것은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이번 정부 개선안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먼저 정부는 지출 증가의 근본 원인이 극빈층 진료비가 무상이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본인 부담이 없어 병원을 너무 자주 이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월 6000원을 주고 이만큼만 의료를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 선을 넘을 경우 2만원까지는 극빈층이 부담해야 한다. 극빈층 대부분은 소득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번 조치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에서 지급할 6000원을 다른 데 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극빈층의 과도한 의료 이용은 외래진료보다 입원이 더 심한 편이다. 건강보험 가입자에 비해 입원일수가 11.5배나 많다 보니 입원비 증가 속도가 외래진료보다 월등히 빠르다. 이번 정부 안에는 입원 진료 통제 장치가 빠져 있다. 따라서 외래진료만을 다룬 이번 개선안이 성공할지 의문이 든다. 환자들은 돈을 새로 부담하게 된 외래진료를 거부하고 돈을 계속 안 내도 되는 입원치료를 더 이용할 것이다.

또 선택 병원제가 병을 키우지 않을까 우려된다. 동네 의원 입장에서는 환자를 큰 병원에 보내지 않고 의료를 많이 제공할수록 득이 된다. 아무도 치료 성과에 대해 감시하지 않는다. 환자가 제때 필요한 치료를 못 받아 병이 악화되면 그 비용 역시 사회가 떠안아야 한다.

외국은 어떤가. 완전한 제도는 없겠지만 우리보다 성숙한 극빈층 의료제도를 갖고 있는 미국과 영국의 극빈층 대상 의료제도를 살펴보면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의료기관 대부분을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빈곤층의 61.3%인 2700만 명의 건강관리를 민간 조직에 맡긴다. 이들 민간조직은 매년 1인당 일정액을 진료비용으로 정부에서 지급받아 환자를 위한 건강 증진, 외래와 입원 진료, 장기 요양을 통합 관리한다. 환자 건강을 제대로 향상시키지 못하거나 진료비용을 높게 요구하는 민간조직은 정부 계약에서 제외된다. 이 제도의 효과성을 인정한 미국 정부는 매년 더 많은 극빈층을 민간조직에 위탁하고 있다.

영국은 병원 대부분을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나라다. 영국의 공공의료조직에서는 환자 수에 따라 할당된 예산안에서 모든 의료를 통합 관리한다. 정부의 이번 개선안과 달리 미국과 영국에서는 극빈층에 무상의료를 제공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고 있다. 외래진료뿐 아니라 모든 의료를 통합관리함으로써 진료비를 절감하며 이 돈으로 수혜 계층을 확대한다.

물론 창조적 대안은 좋다. 그러나 이번 정부안이 당초 취지에 맞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더욱이 사전에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고 성급히 만들어졌다. 단 한번의 공청회도 없었다. 사회적 합의도 없이 극빈층에 의료비를 강요할 정도로 우리 국민을 야박하게 만들 셈인가. 극빈층 건강을 대상으로 '실험'을 할 작정인지 궁금하다.

정우진 연세대 교수·보건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