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예산국회에서 벌어진 여당의 코미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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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통령의 말 폭탄이 국민의 자존심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연말, 국회에서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 22일 저녁 몇몇 여당의원의 실수로 중요 예산부수법안인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부결된 것이다. 법안에는 연말에 닥치는 조세감면 마감을 연장해 주는 내용이 들어 있어 이것이 통과되지 않으면 해당 기업들은 큰 피해를 볼 참이었다. 한번 표결한 법안은 같은 회기 내에는 다시 처리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 원칙이 있어 법안을 연내에 통과시키려면 임시국회를 다시 열어야 한다. 이미 예산안 법정처리시한을 넘겨 임시국회가 한 차례 열린 터에 여당의 어이없는 실수로 또다시 임시국회를 소집하는 편법이 불가피하게 됐다.

그날 밤 출석의원은 222명이고 과반수는 112명인데 찬성은 107표여서 가결에 5표가 부족했다. 열린우리당 의원 8명이 반대.기권한 것으로 알려졌으니 이들만 가세했으면 법안은 통과됐을 것이다.

문제는 '왜'냐는 것이다. 이미 재경위를 통과한 법안이니 여당의원들이라면 굳이 본회의에서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소신에 따른 반대는 별로 없다고 봐야 한다. 이보다는 당일 본회의에서 벌어진 다른 법안 소동에 정신이 흐트러져 그저 표를 잘못 던진 의원들이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 표결에 앞서 한나라당에서 제출한 택시 LPG 특소세 폐지를 담은 법안 개정안에 대한 표결이 있었는데 열린우리당은 여기에 반대해 부결시켰다. 이 법안에 반대한 기분이 본안 법안 투표에도 잘못 이어져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분석이 많다.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소용돌이를 만들고, 여당은 여당대로 신당파와 사수파가 거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 요즘의 여권 풍경이다. 혹여 의원들이 법안보다는 통합신당 설문서나 전당대회, 길게는 자신의 다음 총선 대책에 관심이 쏠려 이런 소극(笑劇)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가. 실수로 부결시켜 놓고 며칠 후 다시 임시국회를 열어 통과시켜야 하는 이 소동…. 여권의 혼란이 민생의 구멍으로 현실화되는 것 같아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