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구조본' 막 내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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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그룹의 경영 총괄 조직 중 지금까지 '구조본'이라는 명칭을 써 온 곳은 한화뿐이었다. 올 3월 구조본을 '전략기획실'로 바꾼 삼성에 이어 한화까지 구조본을 폐지함으로써 재계의 구조본 시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한화그룹은 이번 조치를 통해 구조본을 8개 팀 1실 체제에서 경영기획실장 아래에 투자운영.전략홍보.법무 담당의 세 부사장을 두는 체제로 슬림화했다. 한화 측은 "이번 조직 개편은 각 계열사들의 자율경영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영기획실은 신성장 동력의 발굴 등 그룹 차원의 전략적 의사결정만 하고 구체적인 경영 권한은 계열사 대표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삼성 역시 계열사 자율경영 강화라는 취지 아래 구조본 명칭을 없애고 조직과 인원을 축소했었다. 구조본은 1998년 외환위기 와중에 생겨난 조직이다. 김대중 정부의 대기업그룹 개혁 방침에 따라 각 그룹은 비서실이나 기획조정실 등 총수 보좌 기구를 없애고 구조조정을 담당할 한시적 기구로 앞다퉈 신설했었다. 그러나 이 기구는 본연의 업무가 일단락된 뒤에도 존속해 그룹 경영의 핵심 역할을 해왔다.

구조본이 사라진 배경에는 계열사 자율 경영에 대한 기업들의 높아진 인식에다 지배 구조 개선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작용하고 있다. 삼성이 구조본을 없앤 것도 사회 일각의 비판 분위기를 의식한 조치였다. 현대.기아차 그룹은 2000년 현대그룹에서 분리되면서 계열사 전체를 관리하는 구조본 성격 대신 기획총괄본부를 뒀다. 현대그룹 시절 이른바 '가신 그룹'들이 장악한 기획조정실의 부작용을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LG는 외환위기 이후 지주회사 체제를 갖추면서 그룹의 지주회사인 ㈜LG가 경영 관제탑 역할을 하고 있다. SK도 분식 회계 파동을 겪은 이후 그룹 지주회사 격인 SK㈜ 이사회 산하에 투자회사관리실을 둬 그룹 업무를 조정하도록 하고 있다.

구조본이 사라졌음에도 재계 관계자들은 "계열사의 중복 투자를 방지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한 경쟁력 강화를 위해 방향타 역할을 하는 조직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이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구조본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라면서 "계열사별 자율경영 체제 아래서도 총괄조정기구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중견 그룹들 중에는 경영위기 극복이나 전략적 투자 및 인수.합병을 위해 경영 총괄 조직의 기능을 강화하고 있는 곳도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구조본 역할을 했던 비전경영실을 전략경영본부로 대체하면서 기능도 다소 축소했으나 대우건설 인수 참여 등으로 그룹의 조정 역할이 커지자 지난해 말 다시 그 기능을 강화했다. 재계 관계자는 "구조본 조직은 많은 비판도 받았지만 일사불란한 조직 체계와 자원의 효율적 배분 등에서 장점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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