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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개편과 위장폐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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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에서는 한 분야의 연구에 일생을 바친 전문가와 그 제자쯤 돼 보이는 시민단체 간부가 같은 반열에서 정책을 논하고 있다. 언론에서도 그렇고 정부 위원회에서도 그렇다. 정확한 정보를 가지지 못한 일반인들은 옥석을 구분하지 못한다. 공무원들은 코드 맞추기에 급급하다.

결국 경험과 전문성보다는 여과되지 않은 억지 주장과 국민정서가 국가 정책을 결정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영합주의의 모습이다.

현 정권의 모든 정책이 지난 4년 내내 뭔가 들떠 있고 급진적이며 비전문적이라는 인상을 준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부동산대책도 그렇고, 한.미 관계와 북핵 문제를 다루는 모습도 그렇다.

작은 기업을 경영해도 상당한 전문성과 경험이 필요한 법이다. 하물며 국가를 경영한다는 것은 그 나라가 가진 최고의 정책 능력이 동원돼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4년간 대한민국의 국정은 유감스럽게도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진 우리나라의 국가 발전 수준에 맞지 않는 후진국 수준이었다. 외교도 그랬고 내치도 그랬다.

우리나라도 많은 분야에서 국제 수준의 전문성과 능력을 인정받는 전문가가 많다.

그러나 현 정권 눈에 대한민국에서 어떤 분야에서든 능력을 인정받고 일정한 지위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 기회주의자였고 부패한 사람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정책 결정 과정에 최고 전문가들은 배제되고 검증되지 않은 40대 운동권 출신들이 국정을 좌우했다. 그 결과가 외교에서는 국제적 왕따요 경제에서는 4년째 전 세계 경제 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성장률과 부동산값 폭등이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없다. 어딘가 누군가는 문제를 정확하게 알고 있고 정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현실에선 온갖 잡소리들 속에 섞여 있어 구분이 어려울 뿐이다.

제대로 된 나라에서는 이런 잡소리들이 검증 과정을 거쳐 여과되고, 최고의 경륜과 전문성을 가진 목소리만이 국정에 반영된다. 그게 정치다. 지금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국가적 어려움은 바로 이런 검증을 정치권이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즘 집권세력이 정계개편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정치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정당 이름이 아니라 정치인에 대한 검증을 통해 옥석을 가려내는 것이 돼야 한다. 돌팔이와 사이비를 걸러내야 한다. 급진 논리와 여론 조종, 흑색선전에만 능한 정치꾼들을 걸러내야 한다. 이런 사람일수록 민주주의와 개혁을 들먹인다.

지난 4년 동안 우리나라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이 간판을 새로 달고 몇 사람 새로 영입한다고 해서 갑자기 능력과 경륜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위장폐업일 뿐이다. 대통령과 같은 편에 서서 덕분에 권력의 단맛을 볼 만큼 다 보았으면서,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자 대통령을 배제하고 다른 당을 만들어 다시 정권을 잡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책임 회피고 비겁한 행동이다. 떳떳하게 결과에 대해 공동책임을 지고 정치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정치 프로들은 지금도 여론이 불리하면 위장폐업 후 숙주를 찾아 잠시 잠복했다가 몇 번의 이벤트와 흑색선전으로 얼마든지 국민 여론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 눈에 국민은 조종 가능한 노리갯감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부터 걸러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정계개편이다.

김종석 홍익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