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후의 자금사정(정치와 돈:4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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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뇌물」 여파로 돈줄 끊겼다”/자금줄 보호위해 공급요청도 일단 자제
「수서」·뇌물외유가 몰고온 한파로 여의도정가의 자금시장이 잔뜩 움츠러져 있다.
오죽하면 한달에 20억원이상의 당살림을 만지는 김윤환 민자당 사무총장마저 『수서때문에 재정위원들에게나 후원회에 돈얘기를 꺼낼수도 없다』고 고충을 털어 놓는 실정이다.
민자당은 이것저것 따져봐도 자금사정이 호전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한달에 25∼30%정도 당운영비를 절감하는 긴축운영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수서파문이 민자당의 비대한 살림살이의 감량을 재촉한 셈이다. 평민당쪽에선 『자금사정이 말이 아니다』는 하소연이 더욱 크게 들려온다.
「수서」로 구속된 이원배의원건으로 자금파이프라인의 실체일부가 드러나버려 돈줄이 많이 끊겼다고 한숨이다.
평민당의 한 중진의원은 『이원배의원이 받은 한보돈이 김대중총재의 핵심측근인 권노갑의원에게 전달된 과정의 공개는 극비사항인 자금파이프라인의 관리운영에 큰 타격을 주었다』며 『지금은 자금줄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자금공급요청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수서」로 「돈줄」이 숨어 버리는 것은 당연하며 나에게도 후배기업인이 당분간 「지원」을 끊겠다는 연락이 왔다』면서 『과거 사정한파 때는 그때만 지나면 그만인데 이번엔 자금줄 회복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했다.
자금사정이 악화된 것은 국회의원회관에 가보면 금방 느낄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새해 「인사철」에 은행·대기업쪽 인사들의 회관을 찾는 발길이 부산할텐데 지금은 눈에 띄게 썰렁하다.
재무위소속의 한 의원은 『은행장이나 대기업 임원진 개편이 있는 이맘때 예전같으면 회관을 찾아와 「부탁한다」고 인사했는데 지금은 여러모로 인사의 「질」이 크게 떨어졌다』고 했다. 평민당의 한 초선의원은 『잘 아는 재벌임원이 대표이사로 승진돼 축하전화를 했더니 대뜸 하는 소리가 「지방의회 선거자금을 기부않는다는게 재계의 분위기」라고 말해 내가 할 말을 잊었다』며 『재계의 분위기가 있는데 어떻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수 있겠느냐』고 한탄했다.
「수서」때문에 평민당의 S의원은 생각지도 않은 「빚」을 지기도 했다. 그는 지난 설날 친지·기업인으로부터 작년보다 떨어지겠지만 일정액의 기부금이 들어올 것으로 생각하고 외상으로 3천원짜리 넥타이 5천개(1천5백만원)를 사 지역구에 돌렸다.
외상인사를 한뒤 자금보충을 위해 한 기업인을 찾아갔더니 태도가 돌변해있고 이제까지 자기를 도와준게 알려질까봐 걱정을 하더라는 것이다. S의원을 비롯,많은 야당의원들은 기업인들이 국회의원과의 친분을 「부담」으로 생각하는 세태의 민감함을 탓하기도 했다.
국회의원의 시세가 4년임기 사이클로 보아 내리막길이란 점도 자금사정 악화를 재촉하고 있다. 민자당의 한 당직자는 『국회의원의 시세는 처음 1년간이 최고이며 3년쯤 들어서면 다음 선거자금마련 등으로 굽신댈 일이 상대적으로 많아지는데다 정치불신으로 그야말로 시세폭락인데 누가 돈을 고운 마음으로 주겠느냐』고 딱한 처지를 호소했다.
의원시세가 떨어지다보니 심지어 국회에 선물을 납품하는 업체의 태도가 덩달아 달라졌다는 것이다. 평민당의 한 의원보좌관은 『작년만해도 외상으로 선물을 사서 돌릴 수 있었는데 자금사정을 아는지 업체의 태도가 뻔뻔해지고 외상거래를 안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탓인지 의원들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세우고 있다. 우선 지구당운영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화환안보내기등 소위 「체면유지비」를 대폭 없애고 행사를 간소화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기념품·식사대접도 최소한의 품위유지선에서 그치는 알뜰풍조가 일고 있다.
평민당의 한 의원은 『요즘 큰 행사장에 화환을 보내도 과거처럼 맨앞줄 좋은자리에 놓이지 않고 푸대접 받는다는데 이번 기회에 한달평균 2백만원 정도의 꽃값은 대거 줄여나갈 생각』이라고 했다.
찾아오는 유력인사도 별로 없고 밖에 나가봐야 「배지」를 쳐다보는 눈빛도 좋지 않아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특히 야당의원들은 저렴한 회관식당을 상당히 애용하는 것도 지난해와 다름 모습이다.
사정이 이렇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기초의원 선거에 나설 후보한테 줄 체면치레용 지원금 마련 때문에 걱정이다.
민자당의원들은 중앙당 눈치를 보고 있으나 중앙당에선 아직 모르는체 하고 있다. 서울출신 한 의원은 『후원회 개최도 어려운만큼 중앙당에서 좀 도와줘야 출마자(8명)에게 하다못해 2백만원씩의 기탁금정도를 대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민자당의 경기도출신 초선의원은 『수서로 가장 타격을 입은 의원들이 초선의원이며 중진급은 산전수전 경험이 있어 돈줄이 튼튼한 것 같다』고 부러워하면서 『지방의회선거때 중앙당의 최소한 자금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평민당의 서울출신 한 의원도 『「수서」로 한바탕바람을 일으키려면 어느정도 자금지원이 필요한데 맨몸으로 뛰라고만 한다』면서 『자금사정이 최악일때 지자제를 하니 참 힘들다』고 했다.<박보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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