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의 자정능력/김경동(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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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날짜로 따져 정확하게 4주간을 떠나있는 사이 국내 소식과는 거의 차단되다시피 바쁘게 돌아가는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접한 첫번째 소식이 이른바 수서사건이었다. 이어 그동안 밀린 신문들을 들추면서 잇따라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준 비리 사건들의 기사를 대하고 아연할 뿐이었다.
수서사건 보도에 접하면서 맨 먼저 뇌리를 스친 것은 1970년대초 미국에서 지켜보았던 워터게이트 사건의 노출에서 마무리까지의 길고도 지루한 과정이었다. 신문기자들에 의해 폭로된 그 사건은 의회의 청문회에서 몇달을 두고 껍질이 벗겨졌으며 특별검사에 의해 사법적 처리가 진행되는 길목에서 증거인멸과 사건은폐의 의혹을 산 닉슨 대통령이 결국 모든 책임을 지고 사임하는 사태로까지 발전 되었다.
○민주화 과정서의 아픔
이러한 절차가 취해지는 동안 미국 사회는 크게 소용돌이쳤고 모든 것이 끝난뒤에도 그 충격과 여파는 오래 갔다. 그러나 미국은 크나큰 상처를 입고도 다시 한번 거듭나는 자가정화의 목욕을 하고 역사의 무대에 재등장하는 늠름함을 보여주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진통 또한 민주화의 멀고 험한 노정에서 거쳐야 하는 자가정화의 아픔으로 역사에 남게 되리라 확신한다. 민주적인 원리란 역설적으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회 전체가 서로 물고 뜯는 「개판」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제도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권력이나 재산이나 명예는 모두가 희구하는 희소가치이므로 아무도 독점하지 못하게 하자면 일정한 규칙을 만들어 서로가 지키기로 약속해야 한다.
그 약속을 어길때는 걸맞는 제재가 따른다는 규칙도 포함된다. 거기에는 소위 성역이 있을 수 없으며,아울러 어떤 규칙위반이든 반드시 규칙(즉 법절차)에 의해서만 처리되어야 한다는 법의 공정성을 중시한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민주주의의 제도적인 틀을 갖추느라 온갖 실험을 해왔으나 이러한 원칙의 수준에서 실질적인 훈련을 거치는데는 몹시 미흡했던게 사실이다.
따라서 온갖 규칙위반이 빈번히 일어났어도 제대로 개선하는데 실패하면서 생긴 민주주의의 시체들이 쌓이는 가운데 그나마 느린 걸음이지만 민주화는 한발짝씩 진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는 더이상 민주주의에 비수를 찌를 수는 없고 과감한 자가정화의 노력을 게을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직 구체적인 발표가 없어 속단은 어렵지만 이번에 문제된 일련의 사건들이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은 부정과 비리에도 성역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그동안 표면화되지만 않았지 많은 사람들이 의심해 오던 부분들이 하나 둘 노출되기에 이르렀고 앞으로도 언론이나 검찰,혹은 권력의 핵심 자체까지 포함해 비리가 있다면 결단력 있는 자가정화를 서두르는 수 밖에 없다.
이때 우리 사회가 받게될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을 참고 이겨나가야만 민주화의 길은 한층 더 굵고 곧아질 수 있다. 행여 이것이 두려워 이번에도 피해간다면 소생할 가망은 그만큼 줄어들 따름이다.
○법의 공정성 중시해야
대체로 부정부패란 독점욕에서 나오고,서로 반대급부가 있기에 주고 받는데서 성장한다. 그 뿌리를 없애는 방법은 우선 그 독점의 대상이 되는 권력과 금력의 획득 및 유지를 규정하는 규칙을 제대로 정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쉽게 말해 돈을 벌어도 이제는 규칙대로 하면서 돈을 벌고,번 돈을 더불어 애쓴 사람들과 적절하게 나누어 향유하는 제도를 정착시킬 필요가 있고,권력을 잡아도 규칙에 따라 정당하게 잡고,그것을 자기 개인이나 측근·파당 등에 선심쓰는 자원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국리민복을 위해 꼭 써야 할 데에 아껴 쓰는 것이 되도록 규칙들을 정비해야 한다.
그리고 공직자들도 이제는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과거의 타성에서 군림하려 들지말고 이러한 방향의 개혁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같은 새제도를 만들고 규칙을 고치는 일 자체를 현재의 직업 정치인들과 경직된 의식을 탈피하지 못한 관료들이 맡아 하게되며 기업에서는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점에서 민주시민의 할 일이 태산같다. 무엇보다도 각자가 부패의 온상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살피고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는 민주시민으로 자세를 갖출 일이다.
○각자가 부끄러움 없게
그런 다음 다가오는 지방선거와 총선거등에서는 부정과 비리가 엿보이는 직업정치인들을 완전히 패퇴시키고 자신의 직업을 가지면서 국가와 향토를 위해 사심없이 헌신할 아마추어 정치인들을 대거 진출시켜 그들이 정치를 유일한 직업으로 삼지않는 깨끗하고 효율적인 정치판을 만드는 제도와 규칙을 형성,제정하도록 밀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썩고 경직된 관료들을 규제하고 독려하게 하며,특혜나 바라고 유혹의 손을 내밀며 접근하는 기업인들의 버릇을 고쳐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자가정화 노력도 이렇게 규칙에 따라 키워야 한다.<서울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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