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 해태그룹 박건배 회장|식품 외길 탈피 업종 다각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신 해태」-. 21세기를 향하는 해태그룹이 최근 내건 슬로건이다. 전자 기기에서 미래 식품까지 새롭게 도약하겠다는 해태는 평범하지만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이 말을 택했다. 『2000년대 해태는 근간인 식품 사업과 전자·유통·무역 등 비식품 산업이 균형 있게 성장하는 외형 8조5천억원 정도의 그룹이 돼 있을 것입니다.』 박건배 회장 (42)의 구상이다.
서울 마포로 다보 빌딩 l4층 박 회장의 집무실에는 5개의 대형 트로피와 커다란 술통이 있다. 우승컵은 5번이나 우승한 프로야구단 해태타이거즈를, 참나무 술통은 박 회장의 됨됨이를 설명한다. 친구로부터 선물 받았다는 참나무 술통 위에는 노블와인·그랜피딕 등 해태산업에서 만드는 술들이 올려져 있다. 그가 즐겨 마시는 술이다.
『해태 하면 제과 등 식품업으로 인식해주는 것은 그만큼 해태란 상표가 소비자들에게 깊이 인식됐다는 반증이기도합니다.』

<3인이 공동 설립>
업종 다각화가 추진되는 가운데서도 해태 하면 아직도 제과업으로 인식되는 편이라는 질문에 대한 박 회장의 대답은 이처럼 다분히 역설적이다.
해태는 창업·성장·2세에로의 승계 과정이 여느 재벌 그룹과 사뭇 다르다. 3인 공동 사업체로 출발했으며, 창업자 생전에는 3인 공동체제가 매끄럽게 조화를 이루며 돌아갔으나 2세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서로 떨어져 나가 제 길을 걷고 있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문제도 있었고 아직까지 앙금이 남아 있기도 하다.
해태는 해방둥이다. 광복 직후인 45년10월 서울 남영동 일제 때 나가오카제과 자리에서 이 회사에 근무하던 동료 직원 박병규 (현 박건배 회장의 선친)·신덕발·민후식씨 등 3인 공동으로 설립됐다. 창립 이후 해태는 음료·농수산·산업·유업 등 계열사를 인수 또는 설립하면서 식품 관련 분야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러나 77년12월 3자 동업 체제의 축을 이루던 박병규 사장이 타계한 뒤 2세간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박병규 사장의 장남인 박 회장은 당시 30세의 젊은 나이에 해태제과 기획과장에서 일약 상무로 승진, 경영에 뛰어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79년3월 원만한 2세 승계를 위한 교통 정리역을 맡았던 나웅배 사장 (현 민자당 정책위의장)이 물러나면서 해태제과는 신정차 사장-박건배 부사장 체제를 갖췄다. 또 다른 2세 민병덕씨는 해태유업 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후에도 갈등은 계속돼 81년6월 결국 서로 분가하기로 합의했다.
박 회장은 해태로선 이 시기가 성장의 정체기요, 커다란 시련기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2세들끼리 모여 여러 차례 밤늦게 까지 술을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결국 서로와 해태를 위해서 독립하기로 했지요. 설상가상으로 당시 노사분규까지 겹쳐 더욱 애를 먹었습니다.』

<새 사업 착수 신중>
민씨는 유업을, 신씨는 관광을 택했다. 박 회장은 모 기업인 해태제과와 함께 당시 적자였던 농수산·주조·상사 등 나머지 계열사를 선택했다.
이미 78년10월 해태상사 설립과 79년11월 신방전자 (현 해태전자) 인수를 주도했던 박 회장은 분가 후 새 회사 설립에 더욱 적극성을 띠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산업도 변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박 회장은 당시의 흐름인 업종 다각화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모르는 사업에 바로 뛰어들진 않고 충분히 관찰하고 실험한 뒤 새 사업에 착수했다.
광고 대행 업체인 해태기획 (현 코래드), 유통 업체인 코스코, 프로야구단 해태타이거즈가 잇따라 설립됐다. 한국 커피, 대아 상호 신용금고, 관 이음새 생산 업체인 미진 금속을 인수했다.
83년1월 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박 회장은 식품이 주종이었던 그룹 경영에 과감하게 유통·전자·서비스 등 비식품 분야를 접목시켜 전환을 꾀한 것이다. 가끔 식품 쪽에 더욱 주력해서 전문화를 꾀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미국 뉴욕대·대학원에서 재무 관리를 전공한 박 회장은 스스로 유통 쪽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고 말한다. 콤팩트디스크 플레이어 (CDP)를 주로 생산·수출하는 전자도 앞으로는 내수에 비중을 둘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 회장은 제과·음료의 일부 제품이 경쟁 업체인 롯데에 처지자 88년1월 식품 연구소를 설립, 신상품 개발을 진두 지휘했다. 음료는 과일을 갈아서 제품 속에 넣은 「봉봉」과 「훼미리쥬스」「과일촌」을 히트시켰다. 만두·돈까스 등 냉동 식품도 관심의 대상이 됐다.
식품업에 대한 박 회장의 열성은 89년8월 당시 해태제과와 음료를 합병, 매출액 l조원의 국내 최대 식품 메이커로 키우려했던 구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순수한 경영 전략 측면에서 시도했는데 물타기 증자라는 오해 때문에 백지화하고 말았습니다.』
박 회장은 『지금 다시 추진한다해도 그런 시각으로 볼 것이므로 앞으로 증시 상황을 보아 해태음료를 따로 공개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사랑이 있는 기업」을 가장 중요한 기업 이념으로 강조하는 박 회장은 3자 동업 경영의 앙금으로 남아 있는 해태유업과의 상표권 다툼을 『가슴 아픈 이야기』로 여긴다.
우유를 주로 생산하는 해태유업 (대표 민병헌)이 따로 떨어져나가 상표를 같이 쓰기로 약속한 기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해태 상표를 쓰고 있으며, 해태음료·제과와 비슷한 제품을 생산하는 등 피해를 주고있다는 해태제과 쪽의 주장이다.
직원과 함께 식사 비식품업 부문에 대한 지속적인 영역 확장을 꾀하고 있는 박 회장은 이 부문의 전문 인력이 부족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또 해태가 호남 기업이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인재 등용에 신경을 쓴다.
박 회장은 매주 토요일이면 서울 영등포 제과로 출근해 업무를 챙긴다. 술·담배를 같이 즐기는데, 고교 동창들과 어울리면 양주 l병은 거뜬히 마실 정도로 건강에 자신이 있다. 술은 해태산업에서 만드는 것을 즐겨 마시며, 가장 아끼는 해태제품은 개발도중 부친이 돌아간 오렌지주스다.
그는 타이거즈 방수원 선수가 아팠을 때 중국 여행길에 귀한 약을 직접 사다줄 정도로 직원들에게 자상함을 보이기도 한다. 자주 야구장에 들르며 공장 시찰 때는 꼭 구내 식당에서 직원들과 어울려 식사를 한다.
해태는 원래 중국의 동북 지방 황야에서 살았다고 전해지는 맹수인 해치를 창업이래 상표로 쓰고 있는데, 그 도안을 여러 차례 바꿔 「상당히 젊어져」있다. <양재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