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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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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중국 수(隋)나라의 문제(文帝)는 배포가 크거나 아니면 허풍이 셌던 군왕이었던 듯하다. 하류에 이르면 바다처럼 넓어지는 창장(長江)을 고작 허리띠 한 가닥에 비유했으니 말이다. 그는 "어찌 띠 한 가닥에 불과한 강물(一衣帶水)을 겁내어 도탄에 빠진 진(陳)나라 백성을 내버려 둘쏘냐"면서 창장 이남의 진나라 정벌에 나섰다.

이때 나온 고사성어가 '일의대수'다. 좁은 강이나 바다를 사이에 둔 이웃 사이를 뜻한다. 특히 일본에서 한.일 관계를 비유하는 말로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동해에 면한 돗토리(鳥取)현의 역사를 뒤적이다 보면 일의대수란 말의 의미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1819년 돗토리 앞바다에 조선의 상인 12명이 탄 배가 표류했다. 강원도 평해를 출발한 뒤 풍랑을 만났기 때문이다. 돗토리 관헌은 이들을 구조하고 극진히 보살핀 뒤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1991년 현지에서 발견된 족자에는 당시 상황을 담은 그림, 선원들의 감사 편지와 함께 표류자 명단이 들어 있었다. 돗토리현은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후손들을 찾아내 교류 행사를 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이 일화는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널리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돗토리 지방사에는 반드시 우호의 역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양국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는 독도 문제다. 일본 문헌에는 돗토리 주민들이 가장 먼저 독도를 발견한 것으로 돼 있다. 1618년 요나고(米子)의 어부 오타니(大谷)와 무라카와(村川) 가문이 당시 정부로부터 '도해(渡海) 면허'를 받아 울릉도를 오가는 길에 독도 주변에서 고기잡이를 했다는 기록이다. 일본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당시 독도는 돗토리현에 속했다고 주장한다.

그런 돗토리에서 일부 현의회 의원과 우파 단체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려다가 지난주 제지됐다. 조례 제정을 촉구하는 진정을 심사한 상임위원회가 "교류에 지장이 초래되면 현민이 납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류 결정을 내린 것이다. 지난해 시마네(島根)현의 결의가 '외교전쟁'으로까지 이어진 전례를 의식한 사려 깊은 판단이다.

때마침 '다케시마의 날'에 대항해 '대마도의 날'을 제정했던 마산시도 올해는 기념행사를 보류키로 했다고 한다. 역시 우호와 교류를 존중하는 뜻에서였다. '다케시마의 날' 파문을 겪고 난 뒤 양국 지자체의 한결 성숙해진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일의대수'의 의미가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