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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 넘쳐 사랑·행복·꿈 되찾으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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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노숙인들로만 구성된 극단 ‘징검다리’가 커튼 콜(관객 인사)에서 선보일 댄스를 연습 중이다. 징검다리는 18일 서울 대학로에서 ‘사랑 한 번 해보고 싶어요’란 제목의 연극을 공연할 예정이다. 신동연 기자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형, 정말 미안해. 형…."

이영준(41.가명)씨는 거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지경이었다. 다들 숨을 죽여 이씨를 바라봤다. 조금 뒤 "다음 '꿈'팀 준비해 주세요"란 소리가 적막을 깼다.

14일 서울 갈월동 '노숙인 다시 서기 센터' 지하의 8평 남짓한 방에서 만난 이씨는 연기에 몰입 중이었다. 방엔 이씨말고도 10여 명의 사람이 있었다. 노숙인들로 이뤄진 극단 '징검다리' 소속 배우들과 이들을 돕는 자원봉사자 스태프였다.

다들 곧 있을 '사랑 한번 해보고 싶어요'란 연극공연의 막바지 연습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노숙인 12명으로 구성된 '징검다리'는 지난해 12월부터 센터에서 노숙인을 위해 연극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만들어졌다. 센터는 노숙인에게 인문학을 가르쳐 자활의지를 높여주는 성프란시스 대학도 운영 중이다.

연극 치료 프로그램을 지도한 용인대 연극학과 박미리 교수는 "처음부터 공연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노숙인들이 흥겹게 놀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노숙인들은 연극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자신감을 점점 회복하기 시작했다.

단원 신수명(55.가명)씨는 "노숙생활을 하면서 자포자기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내 감정을 다시 나타낼 줄 알게 되면서 자활의지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노숙인들은 대부분 공원 관리 등 자활사업을 통해 재기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다 한 노숙인이 "우리 이야기를 직접 연극으로 공연해 보자"고 먼저 제안했다.

'징검다리' 단원들은 모두 이전에 연극을 해본 적은커녕 연극 한 편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연기의 집중도는 전문 연기자 못지 않았다. 대사를 잊어버리거나 자신의 연기가 어색할 때는 정말 미안한 표정이었다.

박 교수는 "단원들의 연기는 서투르지만 열의는 대단하다. 연습에 나오려면 하루 일을 하지 못해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지만 연극이 그냥 좋아서 나온다고 한다"고 말했다.

공연은 사랑.행복.꿈이라는 세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모두 단원들의 개인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영준씨가 열연한 '행복'도 이씨 자신의 사연이 많이 담겨 있다. 이씨는 중국집 배달, 공사장 막일 등을 전전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변두리에 조그마한 가게를 차렸지만, 성인오락실에 빠져 재산을 다 날렸다. 그래서 이씨가 극중에서 연기하는 '두칠'도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인오락실에 투자하다 실패하게 된다. 공연은 18일 오후 7시30분 대학로 아리랑소극장에서 올려진다. 공연장에서 거둔 모금은 서울역 노숙인 진료센터 건립에 사용될 예정이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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