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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추억] 중요무형문화재 황혜성 선생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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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궁중음식 전문가인 황혜성 선생이 14일 오후 12시30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86세. 고인은 1920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여학교를 졸업한 뒤 한 평생을 궁중음식 연구와 전승에 힘써왔다.

"조선이 망하고 한국 문화가 압살 당하던 어두운 시절, 일본에서 일본의 음식과 서구식 영양학을 배웠습니다. 22세에 숙명여전 조교수로 임용돼 출근하는 첫날 일본인 교장으로부터 조선요리를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영양학이나 외국 조리를 주문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1999년 발간된 '12첩 수라상으로 차린 세월'이라는 자서전에서)

황혜성 선생의 궁중음식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일단 배워야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마지막 왕비인 순종황후 윤비가 거처하던 창덕궁 낙선재로 찾아갔다고 한다. 여기서 궁중음식의 스승이자 조선왕조의 마지막 주방상궁인 한희순(궁중음식 제1대 보유자)선생을 만난다.

"고종.순종을 모셨던 궁중 나인 4명이 낙선재 주방을 맡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고참인 한 상궁에게 매달렸습니다. 명맥만 유지하던 왕실이지만 서릿발 같은 기품은 당당하고 대단했어요. 궁인들은 나를 바깥사람이라며 견제하는 등 서럽기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지요. 알아듣지도 못하는 궁중말을 되묻지도 못하며 눈동냥.귀동냥으로 적어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서울 청파동 숙명여전에서 안국동 낙선재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가는 생활이 몇 달째 이어지자 한 상궁이 마음을 열고 황 선생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전문학교 선생 월급은 고기.생선 등 고급 재료를 사는데 고스란히 들어갔다. 이후 황 선생의 인생은 궁중음식 연구와 전승으로 이어졌다.

1972년 식생활 분야 문화재 전문위원,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보유자, 올 8월엔 조선왕조 궁중음식 명예보유자로 지정됐다. 고인은 서울 가회동에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 전통 궁중음식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궁중음식 조리법을 계량화했으며 조리법을 전승하는데도 앞장섰다.

단아한 몸가짐과 조리 있는 말투로 대중매체를 통해 궁중요리를 소개해 일반인에게도 친숙한 고인은 숙명여대.서울대.명지대.한양대.성균관대 등에서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20세기 초 조선 왕조가 무너지면서 전통 음식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는데, 21세기 초에 이들 식문화가 확연히 되살아남을 볼 수 있다니 분에 넘치게 보람될 뿐이야. 훌륭한 스승을 만난 게 고맙고, 그 명맥을 이어가는 제자를 길러 낸 것이 기뻐…"

고인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 가족들에게 남긴 말이다.

황 선생은 57년 '이조 궁정요리 통고'를 시작으로 '한국의 미각' '한국요리백과사전' '한국음식''조선왕조 궁중음식' 등의 저서와 많은 논문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장남 한용규(주식회사 지화자, 주식회사 이엑스스타&지이티 대표이사), 장녀 한복려(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원장), 차녀 한복선(한복선 식문화연구원 원장), 사위 정무진(주식회사 제일엔지니어링 부사장), 삼녀 한복진(전주대학교 문화관광대학 학장)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의료원 영안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6일 오전 6시. 장지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선산이다. 02-3673-1122.

유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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