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서구엔'천사'가 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병원비에 허덕이는 뇌병변 1급 장애인 이모(57.광주시 서구 풍암동)씨의 예금통장에는 매월 중순이면 어김없이 20만원이 들어온다. 벌써 8개월째지만 누가 돈을 보내는지 이씨는 모른다. 이씨는 "통장을 볼 때마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생색내지 않는 그분의 인품에 감동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신분을 감춘 한 독지가가 불우 이웃을 위해 다달이 수백만원을 내놓아 세밑을 훈훈하게 하고 있다. 30대 후반의 광주시 서구에 사는 남성이라는 것만 확인된 독지가가 선행을 베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0월 중순. 서구청에 전화를 걸어 '행복 서구 나눔운동'에 동참해 한 달에 200만원씩 아무런 조건 없이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후원 사실이 절대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기 바란다"는 말을 덧붙인 뒤 사람을 보내 구청이 추천한 형편이 어려운 중증 질환자 4명의 이름과 예금통장 계좌번호를 받아 갔다.

구청 직원들은 그의 약속을 반신반의했으나 4명의 통장에는 다달이 꼬박꼬박 50만원씩 들어왔다. 이 남성은 통장 송금자란에 자신의 이름 대신 구청에 심부름 보낸 여성 이름을 남긴다.

얼굴 없는 독지가는 올 4월 서구청에 또 전화를 걸어 공무원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살기 힘든 사람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후원 금액을 월 400만원으로 늘리겠다"고 말했다. 구청은 장애인과 혼자 사는 노인 등 20명의 명단과 계좌번호를 전달했고, 계좌마다 매달 20만원씩 들어왔다.

이 독지가는 지난달 14일 서구청을 찾아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심부름하던 사람에게 사정이 생겨 하는 수 없이 내가 직접 왔다"며 "후원 금액을 매월 1000만원으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구청 직원들이 "대단한 일을 하신다"며 신분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는 "누군지 꼭 알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신분이 공개되면 민망해 후원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구청장을 면담하고 가라는 권유를 뿌리친 채 추가 후원 대상자 120명의 명단만 들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날부터 그동안 돈을 보내온 20명에게는 20만원씩을, 모자 가정과 소년소녀가장 등 새로 추천받은 120명에게는 5만원씩 매달 1000만원을 입금하고 있다. 그가 지난해 10월 이후 불우 이웃을 위해 내놓은 돈은 6000만원에 이른다.

이태섭(59) 광주시 서구청 주민생활지원과장은 "쌀 몇 부대를 기증하고도 얼굴을 알리려고 안달하는 세상에 참으로 보기 드문 분"이라며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해 구청에서도 어떤 분인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광주=이해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