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칼럼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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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 보스턴 글로브지 칼럼니스트인 제임스 캐럴은 "미국은 지금 스핑크스 앞에 서 있다"고 말한다(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 12월 12일자 9면).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명운(命運)이 '이라크 출구 전략'이라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뭐냐"고 스핑크스는 지금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묻고 있다. 누구도 풀기 힘든 난제다. 오이디푸스는 운이 좋았다.

해답을 못 찾은 부시 대통령은 공화당과 민주당 원로들로 구성된 이라크연구그룹(ISG)에 도움을 청했다. 숙고 끝에 초당파 원로들은 "마법의 해법은 없다"는 전제 하에 나름의 답안을 제시했다. 지난주 ISG가 내놓은 79가지 제안의 핵심은 ▶이라크 문제의 이라크화 ▶2008년 초까지 미군 철수 ▶이란.시리아와의 직접협상 등 세 가지다.

이라크 내 치안 유지 임무를 이라크군과 경찰에 완전 이양함으로써 미군의 역할을 전투에서 지원으로 전환하고, 내년 말 미군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해 꼭 필요한 전력을 제외하고는 2008년 초까지 다 철수시키며, 이라크 문제를 이란.시리아 등 주변국과 협의하라는 것이다. 대충 손 털고 나오라는 얘기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고개를 젓고 있다. ISG의 권고대로 할 경우 갑작스러운 힘의 공백으로 이라크는 지금보다 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칫 제3차 걸프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3000명 가까운 미국 젊은이의 목숨과 4000억 달러의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 부은 결과가 고작 이것이라면 이라크 전쟁은 게도 구럭도 다 놓친 참담한 패배로 역사에 기록될 수밖에 없다.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란 불명예가 부시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미 국민 사이에 미국의 '봄날은 갔다'는 비관적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매체인 '라스무센리포트'에 따르면 미 국민의 절반 가까운 47%가 미국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다고 보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호기롭게 뛰어든 이라크의 '수렁'과 함께 '팍스 아메리카나'의 퇴조가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은 체면을 접고 피해를 줄이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석유도 아깝고, 중동 민주화의 꿈도 아쉽지만 이라크 문제는 이라크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주변국들의 협조가 불가피하다.

제임스 캐럴은 스핑크스가 기대하고 있는 정답은 미국의 핵무기 감축 약속이라고 주장한다.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규정된 대로 미국이 대폭적인 핵무기 감축과 폐기 의사를 천명함으로써 이란을 핵 협상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라크 문제 해결에 대한 이란의 건설적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캐럴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핵 보유국인 이스라엘을 중동 비핵화 구상에 참여시켜 이란 등 이슬람권의 안보 불안을 해소시켜 주는 노력도 필요하다.

미국은 6자회담 형식이지만 핵실험을 한 북한과도 대화에 나서고 있다. 이란과 협상을 못할 이유가 없다. 이라크 내 시아파.수니파.쿠르드족과 이란.시리아.이스라엘.팔레스타인.레바논.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국이 참여하는 다자협상을 통해 이라크 문제의 항구적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협상의 진전과 미군 철수 속도를 연계시키고, 미국은 중재자의 역할로 물러서야 한다. 그것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미국도 살고, 이라크도 사는 길이다.

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