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 구두의 본향…하루 20,000켤레 생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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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싸구려 구두의 노점 상점으로 잘못 알려진 염천교 주변의 구두거리는 기실 「맞춤 구두의 본향」이다.
6·25직후 군화가 신사화로 탈바꿈하던 시절부터 60년대 통굽 구두를 거쳐 80년대 디스코구두, 현재의 캐주얼 구두에 이르기까지 이 거리는 줄곧 맞춤의 논리를 고집스럽게 지켜왔다.
『인체 가운데 가장 고생하면서도 천대받는게 발 아닙니까. 발이 편해야 육체·정신 모두 펀하지요.』
발의 건강학을 주장하는 S제화 심상훈씨(49)는 신기료 출신이자 이 거리의 터줏대감.
『6·25 직후 하나 둘 들어섰지요. 처음엔 넝마주이·고물상으로부터 헌 구두를 사들여 때 빼고 광을 내 새것을 만들어 팔았어요.』
당시의 인기 구두는 군화(워커)를 다듬은 단화.
『불자가 귀한데다 군화는 워낙 질겨 오래 신을수 있었지요. 요즘같은 과소비 시대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지만요』
인근 청과·수산물 시장(현 서소문공원)과 함께 급속히 성장, 비록 가건물의 가게들이었지만 나름대로 「명성」을 쌓아가면서 중고품 수선→소매→도매로 변천하게 된다.
『80년대 초만 해도 전국 양화점 구두의 70%정도를 이곳에서 공급했어요』
이 거리에는 현재 1백여개 업소가 들어서 있다.
하루 생산물량은 2만여족. 주 고객은 전국의 양화점이다.
한 켤레의 구두가 만들어지는데는 본을 뜨는 교장, 재단, 미싱, 바닥처리 등 숙련 제화공들의 손을 거쳐 4∼5일이 걸리기 때문에 양화점 주인들이 주문받은 맞춤구두를 발 모양형에 맞춰 이곳에서 사다 적당한 마진을 붙여 고객에 넘긴다는 것이다.
보통 구두의 한켤레 값은 쇠가죽의 경우 재료비 6천원, 공임 7천원에 1천원의 마진을 남겨 1만4천원선.
이것이 일반 양화점에서는 2만5천∼3만원선으로 뛰고, 유명메이커의 상표가 붙을 경우 5만∼7만원으로 둔갑한다.
『구두만큼 유행에 민감한것도 없어요』
제화공출신의 F제화 사장 장룡구씨(40)는 여자구두를 주로 다룬다.
『60년대엔 미니스커트와 판탈통이 유행하면서 구두도 앞뒤가 똑같이 높은 통굽이 인기를 끌었어요』
통굽도 70년대 들어 복고풍과 함께 힐구두로 자리 바꿈했다가 70년대 후반에는 단화로, 최근엔 신기 편한 캐주얼 형으로 바뀌었다.
이에따라 장씨가 갖추고 있는 발모양형도 3백여 종류.
길이와 넓이에 따라 형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코가 뾰족한 것, 둥근 것, 넓적한 것 등 변형이 더 많다.
이 구두거리의 원조는 염천교 서쪽.
그러나 80년 서소문공원이 들어서면서 90여개 업소중 40여개소가 염천교 동쪽으로 옮겨가 지금은 동쪽이 더 큰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구두가게가 성업하다보니 자연히 피혁상들도 모여들어 서쪽에 두곳, 동쪽에 30여곳이 있다.
『70년대 초만 해도 색깔 고운 인조가죽이 천연가죽보다 비싸고 인기도 끌었지만 요즘엔 천연가죽을 많이 찾아요』
S피혁 허남원씨(33)는 『양가죽은 호주·인도에서, 쇠가죽은 주로 미국에서 수임해 수요를 충당하지만 질기기는 역시 국산』이라고 했다.
한우가 거칠게 자라고 벌·모기에 많이 쓰여 그만큼 가죽도 질기다는 것이다.
이 염천교 구두거리도 최근들어 사양길에 들어섰다.
『유명 메이커들이 B·M·L제품 등 중저가 구두를 생산하는데다 상품권을 마구 발행, 80년대 중반이후 시장 점유율이 70%에서 20%선으로 뚝 떨어졌어요』
S제화 이재룡씨(42)는 그동안 K제화 등 유명메이커에 납품해왔다.
『상표를 붙이지 않았을 뿐, 유명메이커 구두와 똑같지요. 가격도 1만7천원선으로.』
그러나 소비자들이 「상표」를 선호하는데다 제화공들의 인건비 상승으로 가격경쟁력마저 떨어져 최근 당산동 공장의 매각에 나서 업종 전환을 꾀하고 있다.
게다가 수년전부터 따뜻한 겨울이 계속돼 맞춤이 주류인 부츠마저 수요가 끊겨 어려움이 더 커졌다.
이에따라 이 거리의 구두가게 주인들은 품질개선·신모델 창안 등 자구노력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J제화 조광현씨(38)는 지난해 10월 제화인 협회를 구성, 외국의 패션잡지를 통해 최신 유행을 알아보고 또 최근에는 일본을 단체로 방문, 구두 업계를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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