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조지상백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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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장원
하얀침묵
잿빛 침묵을 열고
하얀 언어가 내린다.
정답게 소곤소곤
김으로 내리다가
또 다시 하얀 침묵으로
얼어붙는 언어들.
이용희 <경북 문경군 마성면 외어4리 935>
차상
개발현장
I
땅따먹기 옛 고삿길 열세평 오막살이
등기부 흔적없어 가로등 불빛 아래
자모회 통지서만 봐도 주눅드는 엄니 가슴.

좌판에 시름 담아 여명을 일깨우면
가족들 웃음소리 부서지는 공사장
햇살은 웃돈이 붙어 아파트만 귀가 큰다.
이종현<전북 이리시 영등동 547의30>
차하
징소리
대물림 시려 떠난 새 아가 기다리며
호롱불 심지 돋워 베틀에 감
소망
솥뚜껑 거친 손끝에 곱디 고운 세모시.
바랭이 엉긴 응얼 꽃상여로 뜨던날
뿌랭이 모진 내림 너무도 사무쳐서
초가을 토방 뜨락에 피빛노을 뿌렸던가.
조선 아낙 곧은 넋 올올이 날개 되어
동구 밖 뿌연 신작로 지푸라기 떠돌다
빈 뜨락 베틀 가락에 솟구치는 징을 친다
윤상희 <청주시 봉명동 172의 7 주공연립 41동104호>
입상
노인
우리의 사는 법은 겨울 나무 비밀이듯
잎새가 산이라면 뿌리는 밧줄되고
바램은 아득하게만 기도하여 그득하네.
지그시 마음모아 벗기우는 사념의 무게
세월 입은 고목들 한겹 한겹 떼어내면
일흔의 앙상한 바람을 지팡이로 때린다.
곽진석 <경남 삼천포 시신벽동96>
첫추위
가을이 급사한
이 아침의 어이없음
형편없이 추워지는 내 입은 옷의 얇이
어차피
삶은 손님인 것을
아닌 반겨 맞을수야.
이증숙 <인천시 남구주안 7동 1283의15>
한난
한적한 사랑채에
은은한 향기 풍겨
문방사우 안상위에
한란을 올려 놓고
선비의 책 읽는 풍광
달빛 얹어 떨고 있다.
조훈영 <부산시 금정구 부곡3동 219의15>

밤 새워 뒤척이며
먼 바다를 건넌다
돛대 없는 목선 한 척
표류하는 거친 바다별들이 숨어서
지새는 등대불을 찾는다.
출렁이던 파도 소리도 귀를 닫고 누워 있고
적막의 늪을 헤매며 길을 찾는 나의 분신
먼 포구 뱃고동 소리에 꿈도 놀라 달아난다.
김갑동<부산시 남구 문현 4동 856의3>
고향
어머니
풀숲에 누워
하늘을 보았어요
고향집 뒤뜨락의 정화수 같았지요
이제는 새 영을 이으러 돌아가고 싶었어요.
나뭇잎은 뿌리로 가고
흙은 다시 고요하지요
산새는 지저귀고 햇볕은 따뜻한데
가만히 눈을 감으면 고향집이 보이네요.
이우식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사무소>
눈오는 날의 항간
김동직
그것은 이산의 아픔더러는 슬픔이더니
배고픈 일월에도 풍년이 드나보다
가지끝 시린 마디에 눈꽃으로 법 그렸네.
감발 신고 넘던 행적감아 이는 흰머리
고삐 풀린 망아지
하늘 향해 우노라면
사무침 굽이를 돌아 눈발 타고 오는가.
빈 늪 허허로이
구름 뭉게 세월 갈듯
눈물 반쯤 섞인 나날
곰삭이는 산창 가
한치 삶 사리고 앉아
그 행간을 넘나들란다.
시작메모
이산의 아픔, 그리고 수많은 비극을 뒤로 두고
또 한해가 열렸다.
무성한 통일논의가 오가고
남북교류가 가시화 될수록
이산의 아픔은 더해가는 것일까?
하염없이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노라면
아픔보다는 슬픔, 슬픔보다는 탄식이 앞을 가린다.
금년은 새해 벽두부터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길조가 될지? 아니면 더 많은 실망을 안겨다 줄지?
그 아무도 모른다.
속절없는 가슴을 열고 나만을 가늠해 볼 뿐이다.
약력
▲1930년 충남 우산 출생
▲『시조문학』을 통해 등단
▲가람문학, 한밭시조문학 동인
▲한국문인협회 온양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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