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임 영(영화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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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약관 20세의 하명중이 밑천이라곤 얼굴 하나로 중국·일본 등을 드나들며 그곳 톱 영화사를 상대로 주역출연도 하고 거래도하는 인생경험을 3년에 걸쳐 쌓은 셈이다. 말은 영문과 재학생이었기 때문에 영어로 그럭저럭 통했다.
이때가 60년대말이고 보면 이땅에 개방사회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던들 청년들의 행동반경은 좀 더 빨리 확대되지 않았을까.
일화 2백50만엔으로 귀화하여 일본배우가 되라는 그쪽 동보영화사의 제의를 박차고 돌아온 하명중은 즉시 정승문감독의 『누야 왜 시집 안가노』(70년)에서 청룡상 신인상, 조문진감독의 『약속은 없었지만』(70년)에서 백상상 신인상을 탄다.
한운사의 인기 KBS드라마『꿈나무』에 출연하고 나선 이원세감독의 『나와나』(72년)에서 백상상주연상, 홍피감독의 『몸 전체로 사랑을』(73년)에서 아시아영화제 주연상, 유현목감독의 『불꽃』(75년), 임권택감독의 『족보』(78년)에서 각각 대종상주연상을 탄다.
그리고는 유현목감독의 『사람의 아들』(80년), 이두용감독의 『최후의 증인』(80년) 등에 출연하는데 대체로 1백여편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그러다 형 하길종의 작고 후부터 숙원인 감독데뷔를 『X』(83년)로 하여 대종상 신인 감독상을 타는 데까지는 좋았으나 빚7천5백만원을 진다. 제작을 직접 했기 때문이다. 빚을 지는 경험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형 하길종이 미국에서 돌아와 처녀연출한 이효석원작의 『화분』(73년)도 제작은 하명중이 했는데 집도 날리고 1천7백만원의 빚을 졌다.
이때가 26세때니까 그에겐 일찍부터 7전8기식의 사업가적 소질이 농후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해서 그가 돈이 벌리는 일이라면 체면불구, 수단 방법을 안가리고 덤벼드는 업계의 몇몇 제작자겸 극장업자와 비슷하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는 5년 전 하명중영화제작소를 설립하고 나서 극도로 예술성을 추구한 『태』(86년)를 만들고 자신의 말로 「알거지」가 되었고, 어찌어찌 숨을 돌리게되자 이번에는 여성감독의 필요성을 느끼고 유일한 현역 여성감독 이미례에게 『물망초』(87년)의 연출 의뢰를 했다. 이것도 물론 흥행이 안되었는데 새해 프랑스에서 있을 세계여성영화주간에 출품 명예(?)라도 건져볼까 하는 생각이다.
그는 그동안 외화수입에도 7전8기의 이골이 나서 처음에는 양질의 외화를 들여온답시고 『오셀로』(Othel1o·86년)를 갖다 걸었다가 깨졌다. 이 『오셀로』는 프랑코 체피렐리감독에 플라시도 도밍고 주연으로 세계의 오페라광들이 열광한 걸작이었지만 한국에선 사람이 안들었다. 그 당시 필자는 그와 전화통화를 한 일이 있었는데 『오셀로』의 참패로 울먹울먹하고 있었다.
그러다 정신을 가다듬고 『플래툰』 『로메로』 『잡초』『시네마천국』 『베어』등 양질이면서도 흥행이 잘되는 영화들을 들여다가 다시 8기했다.
그는 또한 극장경영에도 손을 대 브로드웨이극장에 공동 투자해 간판격으로 대표이사가 되었는데 경영이 순조로워지니까 동업자가 뭐라고뭐라고 해서 깨끗이 물러서고 말았다.
그는 최근 부모없는 소년·소녀가장을 테마로 한 『혼자 도는 바람개비』를 제작·감독했는데 아직 개봉은 안하고 있다. 이 영화는 얼핏 보기에 대단히 순수·소박한 것으로 형이 공군기술학교시험에 떨어지고 가출하자 어린 소년이 비닐재배 따위를 하며 할머니와 애써 살아가고, 어머니가 가출하자 눌구의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막노동도 하며 살아가는 한 소녀의 얘기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수기에 당선된 소년·소녀 가장들이 TV에 출연한 것을 보고 교섭해 영화화한 것으로 수입의 50%를 소년·소녀가장들의 복지에 기증하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하명중은 겉보기와는 달리 단순한 배우·감독은 아닌 모양으로 여러가지를 생각하며 큰 포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는 2년전 뇌졸중 증세로 40일간 입원한 적이 있다. 그때 형의 죽음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는 세속적인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선 별 미련이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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