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독면 못받은 「팔」주민/배명복 파리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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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텔아비브시간으로 18일 오전 2시,이스라엘 전국에 공습경보를 알리는 긴 사이렌소리가 울려퍼졌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적」(이라크)의 미사일공격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방송에서는 「밀폐된 방으로 몸을 숨기고,즉시 방독면을 착용하라」는 지시가 흘러나왔고,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동안 훈련받은 대로 신속하게 몸을 움직였다. 한참이 흐른 후 공격이 그쳤음을 알리는 해제경보와 함께 방독면을 벗어도 좋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텔아비브와 하이파를 겨냥한 이라크의 스커드미사일은 12명의 부상자를 내는 경미한 전과를 기록한채 첫날 공격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날 이스라엘에서는 뜻밖의 희생자 4명이 발생했다. 소련제 스커드미사일에 맞아서가 아니라 방독면을 잘못 쓰는 바람에 부녀자 3명과 어린아이 1명이 질식사한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날 이라크가 쏜 8발의 미사일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치를 떠는 화학탄이 장착돼 있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미사일이었을 뿐이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미국이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는 화학무기로 이스라엘 유대인의 절반을 없애버리겠다』고 공언해왔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두려워하는건 당연하다.
이스라엘정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4백70만 국민 모두에게 방독면을 빠짐없이 지급했다. 심지어 소련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해오는 유대인들에게도 공항에 내리기가 무섭게 방독면 하나씩을 나눠줘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정부가 점령지역인 가자지구와 요르단서안에 살고 있는 1백75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서는 단 한개의 방독면도 지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 페만전쟁의 원인가운데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18일 이곳에 와있는 한국기자 18명은 착잡한 심정으로 대사관에서 방독면 하나씩을 지급받았다. 이 흉측한 물건에 얼굴을 파묻지않아도 되기를 바란다는 마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또 우리나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암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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