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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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뚫을수 없는 방패와 찌르지 못할게 없는 창을 일컫는 「모순」이야기는 새삼 할 필요가 없으리라. 한비자가 「난세편」에서 한 말이다. 꼭 오늘의 우리사회같다.
모두들 범죄와 무질서, 이기주의의 극치 속에서 용하게도 자신의 이익을 지킬수있는 방패와 남의 것을 빼앗을 수 있는 창을 꼬나잡고 전개하는 생존경쟁의 마당은 바로 갈등과 모순의 왕국 그것이다. 우리 사회란 심하게 말해 어떤 종류의 방패와 창을 가졌느냐에 따라신분과 계급이 달라진다고도할수 있을만큼 모순론이 적중한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모순론이 실은 한비자의 법치주의 사상의 핵심임을 잊고있는 경우가 많다. 인의만을내세워 통치자의 윤리성을 강조하는 유학자를 강력히 비판한 한비자는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으로 보면서 통치자와 민중의 이익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도덕성만으로는 결코 국민이 선량해질수 없다고 주장한다.
철저한 법치주의와 그 법을 뒷받침할만한 권세를 가질 때만 모순은 해결된다는것이 한비자의 논리다.
언뜻보면 지배계층의 비위에 맞는 엄벌주의를 강조한것 같아서 (사실 한비자는 당시신홍지배계급을위하여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다) 오늘의민주주의적 입장에서는 몸서리쳐지는 대목이 여럿 있다.
그럼에도 『한비자』를 오늘에 권하는 것은 법에 의한평등과 모든 모순의 원인을지배층에 돌리고 있다는 책임소재의 분명함 때문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도덕성을 강조하는 인의파가 많은데 이것은 법적 강제성과실천자의· 이익을 보장할 수있는 제도적 장치 없이는 이룩될 수 없는 공염불임을 한비자는 깨우쳐주고 있다.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하면 손해를 보거나 바보 소리를 듣는다면 대체 그 도덕성이 어떻게 지켜지겠느냐는 것이 모순론의 핵심이다.
그래서 『호랑이에게 날개를 붙여주지 마라. 마을에 날아들어와 사람을 골라 잡아 먹으리라』는 경구가 나쁜 권력을 빗대 나오게 된다. 한비자가 이렇게 처절한 이론과 사상을 낳은 배경은 그 시대였는지 모른다.
중국사에서 춘추전국시대를사마천은 52개국이 멸망하고 서른여섯 임금이 비명으로 목숨을 잃은 천하대란의 시대로 풀이한다. 한비자가 살았던 때의 한나라는 서쪽의 진과 남쪽의 초나라로부터 위협에 시달리는 국가비상시기였다.
말더듬이였던 그는 국력의회복을 위해 탁월한 글들을발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뿐만 이니라 엉뚱하게도 적국 진시황을 감동시키게 되었다.·
『인의를 말하는 자가 조정에 가득찼으나 정치는 어지러움을 면치 못하며』 『밭갈이를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쟁기를 잡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나라가 기울고있다는희대의 명문 「오두」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 좀벌레로 사이비학자·언론인.무사계급·권력층의 측근·상인을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글에 반한 진시황은 한비자를 만나고자 한나라를 침략했다. 예정대로 화평을 위한 사절로 한나라는 대학자 한비자를 진으로 보냈다. 마침 진나라에는 스승 순자밑에서 함께 공부했던 이사가 있었는데 결국 그의 뛰어난 재능을 경계한 나머지 모함으로 한비자는 투옥당한다.
운양감옥에서 그는 동기생이 내린 독을 마시고 죽었고 그 3년뒤 조국 한나라도멸망했다. 그 자신이 모순론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불행한 사상가였다.
그는 철저한 주체론자로 사대주의를 배격하며 선진적인역사관을 수렴하여 명분론을 버리고 국가통치술과 민중의이익을 일치시킬수있는 방법론을 모색했다.
『옛 송나라 사람이 밭 가운데 꺾인 나무에 걸려 죽은 토끼를 발견하자 이에 맛들여 농사를 그만두고 나무만 지켰다(수주대토)』는 일화를 제시하며 한비자는 각박한 현실주의적 정치론을 폈다. 인간 자체를 불신하는 그답게 정치에 대해서도 그는다분히 마키아벨리즘적 요소를 담는다.
정나라 무공이 오랑캐를 정벌키 위한 음모로 먼저 딸을 그곳으로 시집보냈다. 신하들에게 그는 한바탕 전쟁을 하고싶은데 어느나라를 칠까 묻자 관기사란 대부가 오랑캐를 거론했다. 무공은 내 형제 나라를 그렇게 할수 있느냐고 크게 꾸짖으며 그를 사형시켜 버렸다. 오랑캐 왕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경계를 풀었는데 정나라는 곧 침략전을 감행해 쉽게 성공했다.
송나라 한 부잣짐의 담이비로 무너지자 그 아들과 이웃집 노안이 어서 새 담을 쌓지 않으면 도둑이 들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날밤 도둑이 들었는데 주인은 아들을 가리켜서는 기혜롭다고 하면서 이웃 노인은 도둑으로의심했다.<이상 「세난편」> 이 이야기는 왕권정치시대때 왕을 설득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타낸 것이지만 우리에겐 권력이 역사와 지식인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교훈성을 품긴다. 우리나라는 지굼 얼마나 많은 관기사와 이웃집 노인들로 들끓고 있는가. 옳은 말과 비판이 일신의 불행을 낳는예가 오늘의 우리처럼 많은 경우도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리를 일깨우기가얼마나어려운가를 한비자는 「화씨편」에서 증언해준다.
초나라사람 화씨가 초산에서 옥돌을 얻어 응왕에게 바쳤다. 감정의뢰를 맡은 옥장이는 그게 가짜라고 말해 화씨는 왕을 속인 죄로 왼발이 잘렸다. 무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또 그 돌을 갖다 바쳤는데 이번에는 오른 발을 잘렸다. 문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방법을 바꿨다.
초산에서 사흘 낮밤을 울어 피눈물을 흘리자 문왕이그 까닭을 물었고 끝내는 옥돌이 보배로 다듬어져 이것이 화씨의 구슬(화씨지벽)이라 불렸다고 한다.
권위와 힘만으로 현실적인안정이 이륵될 수 없듯이인의와 도덕만으로도 안됨을그는 일찍이 일깨워준 셈이다.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할만한 공정한 법의 개폐와 재정비,그리고 올바른 집행이 따라야함을 새삼 느낀다. 물론한비자가 오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전국시대의 창과 방패가 아직도 유효함을, 아니 인간의 역사가 권력과 비권력으로 나뉘어 있는한에는언제나 양쪽 모두에 교훈성이있음은 부인하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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