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길들여진다는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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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호 30면

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거란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 흘릴 일을 감내한다는 뜻이야.”

학창 시절 모두 한 번쯤은 읽어봤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라면서다. 상대방의 처지와 아픔을 마음으로부터 공감하고 그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게 될지언정 기꺼이 희생을 감내할 각오가 돼 있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친한 친구나 연인들끼리 “나는 너에게 길들여질 거야”라는 말을 주고받은 경험은 누구에게나 젊은 날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22대 국회의원은 ‘거수기’ 오명 벗고
민심 대변하며 소신껏 목소리 내길

하지만 길들여진다는 게 마냥 긍정적 의미만 내포하고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현실 세계에서는 부정적 뉘앙스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음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엄격한 상하 관계의 위계질서 속에서 독단적이고 부당한 지시에 눈을 감게 될 때가 종종 발생한다. ‘이건 아니다’ 싶더라도 이래야 회사 생활이 편해지고 승진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자기 합리화 기제가 강하게 발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잘못된 결정에 침묵과 외면을 거듭하다 보면 시나브로 ‘길들여져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게 현실이다.

22대 국회가 닷새 뒤인 오는 30일 개원한다. 4·10 총선 당선자들도 부푼 꿈을 안고 새롭게 각오를 다지고 있을 것이다. “정치권이 국민적 비난의 대상이 돼 있지만 나는 다를 거야”라며 여의도에 입성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21대, 20대 당선자도 똑같았다는 점이다. 처음엔 다들 의욕 충만하다가도 시간이 흐를수록 윗선과 권력자 눈치를 보는 데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새 그들 또한 기존 정치 문법에 ‘길들여져 있는’ 모습과 마주하기 십상이었다. “나 혼자 소신 발언해 봐야 별수 있겠어. 튀면 찍히기만 하지. 적당히 맞춰 가다가 진짜 필요할 때 목소리를 내면 되잖아”라는 궤변도 늘 함께였다.

이런 도돌이표가 매번 반복돼 왔던 게 한국 정치의 슬픈 자화상이라지만, 그래도 국민의 대리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면 회사 직원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국회의원은 국회라는 헌법기관의 구성원인 동시에 각 개인이 독립적인 헌법기관이지 않나. 헌법 제46조 2항에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괜히 명시돼 있는 게 아니다. 위만 바라보거나 사리사욕만 챙기지 말고 민심에 기반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당당히 “노”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문인 셈이다.

그러려면 ‘미움받을 용기’가 필수다. 물론 독불장군처럼 행동하라는 게 아니다. 대중정당은 대부분 당심과 민심을 반영해 정책과 전략을 짜기 마련이지만 대통령실이나 여야 지도부의 결정이 민심과 현격히 이반돼 있을 때는 독립된 헌법기관으로서 용기를 낼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지도자의 세 가지 자질로 덕망·비전과 용기를 꼽은 것도 같은 맥락일 거다. 국민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단지 권력만 좇는 불나방보다는 소외된 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 같은 정치인이 많아졌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뿐이다.

당리당략과 모사·정쟁을 쳇바퀴 돌 듯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기존의 정치 행태에 길들여지기보다는 하루 버티기조차 힘든 서민들에게, 실업난과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불안해하는 MZ세대에게, 생활고에 더해 고독감에 신음하는 노인들에게 기꺼이 길들여질 결심을 하는 것.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릴 각오를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유권자들이 22대 국회의원들에게 기대하는 모습이다. 이젠 ‘거수기’라는 오명은 벗을 때도 되지 않았나. “정치의 본질은 내 이웃의 아픔을 해결하는 것”이란 정치의 기본 명제를 등원에 앞서 다시금 되새겨야 할 때다.

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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