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채 상병 사건, 일단 공수처 수사부터 지켜봐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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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21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채 상병 특검법 거부권 행사'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사진기자단]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21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채 상병 특검법 거부권 행사'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사진기자단]

본격화된 공수처 수사 결과 보고 판단이 순리  

민주당이 만든 공수처 불신 역시 자기모순적

윤석열 대통령이 어제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채 상병 특검법은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이 단독으로 강행 처리한 것으로, 윤 대통령은 9일 기자회견 때 이미 거부권 행사를 시사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취임 후 열 번째인데 이번 거부권이 가장 정치적 부담이 큰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달 초 4개 여론조사기관이 공동 실시한 ‘전국지표조사(NBS)’에 따르면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찬성은 67%에 달했고, 반대는 19%에 불과했다. 야권이 특검법을 밀어붙인 것도 이런 압도적 찬성 여론이 배경이다. 공수처가 지난 1월 수사에 착수했지만 좀처럼 진도를 내지 못하면서 특검 여론이 강화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의 이번 거부권 행사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특별검사라는 제도는 기존 수사기관의 수사 결과가 미진하다는 비판을 받거나, 애초부터 수사의 독립·공정성을 기대하기 힘든 경우에 도입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채 상병 사건은 이미 공수처와 경찰이 수사를 진행 중인 사안이다. 공수처는 어제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을 불러 집중 조사를 벌였다. 뒤늦게나마 수사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때마침 어제 오동운 공수처장 임명안을 윤 대통령이 재가하면서 공수처 리더십 공백 사태도 해결됐다. 이런 상태라면 일단 공수처의 수사를 지켜보는 게 옳다. 특검을 지명해 새로 수사팀을 꾸리는 것보다 공수처가 훨씬 먼저 사건의 진상을 발표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공수처는 문재인 정부에서 민주당이 검찰을 견제하기 위해 당력을 총집결하다시피 해 신설한 독립 수사기구 아닌가. 지금 윤 대통령은 공수처 수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이 없으며, 공수처가 윤 대통령의 눈치를 살펴야 할 이유도 없다. 민주당이 자신들이 만든 공수처를 못 믿겠다며 특검을 요구하고 나선 것은 자기모순이다.

설령 나중에 특검이 필요한 상황이 오더라도 여야 합의에 따른 특검법 통과가 바람직하다. 민주당 주도로 통과된 특검법엔 대한변협이 특검 후보 4명을 추천하면 민주당이 이 중 2명을 골라 대통령에게 추천하게 돼 있다. 특검의 정파성 논란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야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인사를 특검에 임명해야만 수사 결과가 정치적으로 오염되지 않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9일 회견에서 채 상병 사건 수사와 관련해 “국민들께서 ‘이건 봐주기 의혹이 있다’고 하시면 그때는 제가 먼저 특검을 하자고 주장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공수처 수사를 지켜볼 때다. 특검 도입은 수사 결과가 나오면 그것을 엄밀하게 평가한 뒤 논의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