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서울대판 N번방의 경고…근절돼야 할 디지털 ‘인격 살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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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020년 발생한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2020년 발생한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학교 동문 등 딥페이크 음란물 만들어 유포

교묘해지는 성범죄, 예방과 처벌 강화 시급

서울대에서 이른바 ‘N번방’ 사건을 연상케 하는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같은 학교 학생을 포함한 여성 수십 명을 상대로 불법 합성물을 만들어 온라인으로 퍼뜨린 30~40대 남성 두 명을 최근 구속해 검찰에 넘겼다고 밝혔다. 이들은 피해 여성들의 졸업 사진이나 소셜미디어 사진 등을 음란물과 합성한 뒤 온라인 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 유포한 혐의를 받고 있다. 특정인 얼굴을 다른 이미지와 합성하는 ‘딥페이크’ 기술을 악용한 것으로 엄벌에 처해야 할 디지털 인격 살인 범죄다. 철저한 수사와 가해자 처벌 강화, 재발 방지책 마련이 필요하다.

이번 사건에선 장기적이고 계획적인 범죄의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피의자 중 한 명은 2021년 7월부터 지난 4월까지 여성 48명을, 다른 한 명은 2021년 4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여성 28명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3년가량이나 비슷한 범죄를 저질렀는데 그 사실을 오랫동안 들키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이들은 서울대 동문으로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텔레그램으로만 소통했다고 한다. ‘지성의 전당’이란 대학에서 같은 학교 동문 등을 상대로 이런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은 더욱 충격적이다. 두 사람에게서 불법 합성물을 전달받아 퍼뜨린 공범 세 명도 경찰에 검거됐다. 경찰은 다른 공범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추적 중이다.

경찰의 초동 대처에는 강한 아쉬움이 남는다. 일부 피해 여성들은 직간접적으로 피해 사실을 알게 되자 네 곳의 경찰서에 각각 고소장을 접수했다. 하지만 해당 경찰서에선 “피의자를 특정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사 중지나 검찰 불송치를 결정했다. 이후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의 지시로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재수사에 착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익명성이 강한 텔레그램의 특성 때문에 초동 수사가 쉽진 않았겠지만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하면 경찰이 좀 더 일찍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다. 그랬다면 피해자들이 겪는 마음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디지털 성범죄는 음성적인 공간에서 은밀하게 퍼져 나가는 특성이 있다. 2020년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이후 현장 수사 관행이나 기술적 단속 조치, 관련 사법 제도의 개선이 이뤄졌다고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보듯이 아직 갈 길이 멀다. 성범죄가 날로 교묘해지고 다양해지는 현실에서 다각적이고 근본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2차 가해’로 고통받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성범죄 가해자에 대해선 신속하고 끈질긴 수사로 끝까지 응분의 죗값을 물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성범죄를 저지르면 결코 빠져나가지 못하고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는 인식을 확고히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