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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에서 ‘포니’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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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위성욱 기자 중앙일보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1975년 12월 울산 현대자동차. 포니가 공장에서 마지막 검사 라인을 통과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나오자 정세영(1928~2005) 현대자동차 사장 등 개발자와 기술자 50여명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1967년 현대 창업자 정주영(1915~2001) 회장이 현대자동차를 설립한 뒤 8년 만에 한국 고유 모델의 첫 국산 차가 생산된 순간이다.

당시 ‘포니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아무도 대한민국이 자동차를 독자적으로 만들 것이라고 상상도 못하던 시대였다”며 “그래서 국산 자동차를 만들어 수출하겠다며 ‘자동차 공업계획’을 추진했던 정부도 깜짝 놀랐다”고 회고했다.

울산박물관에 전시된 ‘국내 첫 국산차’ 포니 모습. 김윤호 기자

울산박물관에 전시된 ‘국내 첫 국산차’ 포니 모습. 김윤호 기자

올해는 1974년 세상에 그 존재를 처음 드러낸 국산 차 ‘포니’가 50돌을 맞는 해다. 75년 첫 생산에 앞서 포니는 한해 전인 74년 10월 토리노 국제모터쇼에서 시범 공개됐는데, 당시 세계 자동차 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수입에만 의존해 자동차 후진국이었던 한국이 90% 자체 기술로 자동차를 만들어서다. 이후 포니는 76년 2월부터 국내와 해외에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포니를 생산하기 전까지 현대차는 유럽(영국) 포드의 코티나 2세대 모델을 들여와 생산했다. 해외 업체 부품을 수입해 자체 조립해 판매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당시 승용차 대부분은 영업용 차, 즉 택시로 팔려나갔는데 코티나 택시에서 잦은 고장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포드의 해결책은 황당하게도 ‘비포장도로 운행 자제’였다.

코티나는 선진국 도로 사정에 맞춰서 설계했는데, 당시 한국 도로 포장률은 20% 정도여서 코티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댔다. 사실상 자동차 운행을 중단하라는 해결책을 내놓은 셈이다.

이런 이유 등으로 현대차는 독자적인 고유 모델 개발에 나섰다. 포니 출시로 당시 한국은 8개 자동차 공업국에 이어 9번째 자동차 고유 모델 출시 국가가 됐다. 울산박물관 관계자는 “당시 차 이름을 공모한 결과 ‘아리랑’이 많았는데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노랫말이 있어 결국 논의 끝에 ‘포니’(조랑말)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온 포니는 불티나게 팔렸다. 가격은 200만 원대로 당시 서울 흑석동 기와집(82.6㎡, 250만~350만 원) 한 채와 맞먹었는데도 그랬다. 생산 첫해 매월 1500대씩 연간 1만8000여 대를 팔았다. 1985년 단종되기까지 한국 ‘마이카’ 시대를 이끈 핵심 주역이었다. 포니는 중남미·중동·아프리카·아시아·유럽 등 60여 개국에 수출되며 ‘수출 효자’ 노릇도 했다. 울산박물관이 포니 출시 50돌을 기념해 오는 9월 22일까지 ‘첫 번째 국민차, 포니 테마 전시회’를 한다고 한다. 가정의 달 ‘우리 집 첫 번째 차’로 불리던 대한민국 첫 국산 차를 한 번쯤 찾아봐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