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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 정치의 아이러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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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오현석 기자 중앙일보 기자
오현석 정치부 기자

오현석 정치부 기자

“대표님이 좋아서 벽치다 (벽이 무너져서) 원룸 됐어요.” “대표님 때문에 비 와요, 심장마비.”

지난 18~19일 광주와 대전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행사에서 당원들이 이재명 대표를 향해 쪽지에 적어 보낸 메시지다. 사회자가 대신 읽은 내용 중엔 “대표님 미모에 애덤 스미스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박수 치고 갔다”는 아부도 있었다. 정청래 최고위원이 “이 대표 피부가 우유 빛깔”이라고 말하자, 당원들은 “맞아요”라며 맞장구쳤다. 민주당이 자랑하는 250만 당원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장면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9일 대전 유성구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행사에서 당원 의견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9일 대전 유성구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행사에서 당원 의견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이 대표에겐 한없이 자애롭던 당원들은 민주당을 향해선 한가득 불만을 쏟아냈다. 전남 여수의 한 70대 당원은 “수박(비명계를 칭하는 은어)을 다 물리쳤으면 이제는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야 하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원과 국회의원의 의견을 일치하게 하라”는 요구도 나왔다. 지난해 사법리스크 국면에서 ‘이재명 지키기’에 앞장서고 당내 경선에서 ‘비명횡사’를 이끈 권리당원들이 내민 청구서였다.

최근 민주당에선 한층 강해진 권리당원의 영향력을 두고 ‘뉴노멀(new normal, 새로운 표준)’이란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과거엔 국회의원이 당원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거꾸로 당원이 의원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시대가 됐다는 의미다. 민주당이 중도 확장 없이 지지층 요구에 집중해 치른 4·10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이런 진단이 급부상했다. 이재명 대표도 18일 “중국·북한 이런 데 빼고, 정당이 실질적으로 경쟁하는 나라에서 대한민국 민주당 당원이 제일 많다”며 “민주주의 정당 역사에서 세계적인 첫길을 여는 상황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변화”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권리당원의 요구와 현실 정치의 간극이다. 당원들은 틈만 나면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쟁점 법안의 강행 처리를 요구하지만, 200석을 확보하지 않는 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은 물론 대통령 거부권 무력화도 쉽지 않다. 윤 대통령이 국정 기조를 바꾸지 않은 상황에서 여당과의 협상을 벌이는 것도 당원들이 용인할 리 만무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간 당원들의 ‘욕받이’ 역할을 해오던 비명계는 22대 국회에서 자취를 감췄다. 지지층의 실망감을 앞으론 지도부가 고스란히 져야 한다. 당원들의 연임 요구로 이 대표가 대표직에서 물러나기도 어렵게 됐다. 그래서 민주당 일각에선 “이러다 언젠가는 이재명도 ‘수박’으로 몰리는 것 아닐까”라는 우려마저 나온다. 팬덤 정치의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