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인과 사랑·출산…다운증후군 발레리나의 연극 도전 '젤리피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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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연극 '젤리피쉬' 작품개발 쇼케이스에서 모녀로 호흡 맞춘 배우 정수영, 백지윤과 민새롬 연출이 공연장인 모두예술극장 무대에서 13일 포즈를 취했다. 상대역 정수영과 연습 초반엔 눈도 잘 못 마주쳤다는 백지윤이 지금은 와락 안긴 모습에서 4개월 연습 기간에 기울인 노력이 묻어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왼쪽부터) 연극 '젤리피쉬' 작품개발 쇼케이스에서 모녀로 호흡 맞춘 배우 정수영, 백지윤과 민새롬 연출이 공연장인 모두예술극장 무대에서 13일 포즈를 취했다. 상대역 정수영과 연습 초반엔 눈도 잘 못 마주쳤다는 백지윤이 지금은 와락 안긴 모습에서 4개월 연습 기간에 기울인 노력이 묻어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다운증후군이 있는 27세 여성 켈리(백지윤)가 어느 날 바닷가에서 30대 비장애 남성 닐(김바다)과 사랑에 빠진 뒤 엄마 아그네스(정수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신까지 한다.

연극 ‘젤리피쉬’ 22일 개막 #다운증후군 여성·비장애 남성 #솔직발칙 사랑·임신 이야기 #주연 다운증후군 발레리나 백지윤 #“주인공 켈리 똑똑하고 완벽 #첫 연극 대사 어렵지만 행복했죠”

다운증후군 여성의 사랑과 독립을 발랄하게 그린 영국 연극 ‘젤리피쉬’가 국내 초연한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공연제작사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공동 제작으로, 22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서대문구 모두예술극장에서 관객과 만난다.
'젤리피쉬'는 영국 극작가 벤 웨더릴 원작으로, 2018년 영국 런던 부시 시어터 초연부터 “현실을 반영한 섹시 로맨틱 코미디”(가디언)라는 호평을 받았다. 영국 내셔널시어터(2019), 호주 뉴 시어터(2023) 공연까지 실제 다운증후군 배우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됐다.
한국판은 다운증후군 무용수 출신 배우 백지윤(33)이 오디션으로 발탁돼 처음 연극에 도전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발레를 해온 그는 디지털서울문화예술학교 무용학과 출신으로, KBS ‘인간극장’(2010), 2013년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발레 ‘지젤’ 무대를 통해 ‘기적의 지젤’로 불렸다. 2019년 드라마 ‘고고송’(CGN TV)에서 연기한 적은 있지만, 주연으로 거의 매장면 출연하는 건 이번 작품이 처음이다.

장애인 섹스·출산에 관한 도발적 대사

연극 '젤리피쉬' 작품개발 쇼케이스로 연극에 도전한 다운증후군 무용수 백지윤씨. 주인공 켈리 역에 대해 "강하고 사고 치는 애"라며 "똑똑하고 완벽하다" 자랑했다. 사진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연극 '젤리피쉬' 작품개발 쇼케이스로 연극에 도전한 다운증후군 무용수 백지윤씨. 주인공 켈리 역에 대해 "강하고 사고 치는 애"라며 "똑똑하고 완벽하다" 자랑했다. 사진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켈리 역을 맡아 그가 내뱉는 대사도 솔직하고 발칙하다. “나는 닐이랑 섹스하는 거 다 좋아” “나도 남자친구 사귈 수 있어. 여긴 자유 국가야” “나 버려. 이해할게. 근데 그게 (우리) 엄마 때문인 건 안 돼” “난 좋은 엄마가 될 거야” 등 기존 공연‧미디어에 묘사된 장애인 캐릭터와 다르다.
장애인과 사귄다는 이유로 혐오와 의심 섞인 시선을 받는 닐의 고충도 생생하다. 켈리에게 항상 “너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고 말해온 엄마 아그네스는 정작 딸이 자신처럼 다운증후군 자식 때문에 고생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까 봐 두려워한다.
지난 13일 연습이 한창인 백지윤을 아그네스 역의 배우 정수영(52), 민새롬(44) 연출과 함께 만났다.
“켈리는 사고 치는 애다. 저보다 똑똑하고 강하다”고 소개한 백지윤은 “무용은 몸으로 호흡하면 되는데, 연극은 대사랑 동선이랑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몇달 전부터 대사를 여러 번 반복해서 외웠다”면서 “힘들어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해서 재밌다”고 활짝 웃었다.

불안감 낮추는 감각 워크숍…비장애 창작진도 도움돼

13일 연극 '젤리피쉬' 연습 현장. 영국 원작에선 정신장애로 설정됐던 도미닉(왼쪽) 역할은 한국 공연에선 저신장 배우 김범진이 연기했다.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3일 연극 '젤리피쉬' 연습 현장. 영국 원작에선 정신장애로 설정됐던 도미닉(왼쪽) 역할은 한국 공연에선 저신장 배우 김범진이 연기했다.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42㎝의 작은 키, 선천적으로 약한 근력‧균형감각을 “발레하는 즐거움”으로 극복했던 그는 보통 2개월 정도 하는 공연 연습을 올 1월부터 4개월 가량 진행했다. 장애인 공연 제작 방법론을 개척해보자고 출발한 기획이다. 프롬프터를 무대 앞에 설치하는 데 더해, 장애‧비장애 출연‧제작진의 협업을 돕는 ‘창작 조력자’란 직책을 도입해서 긴장‧불안감을 해소하는 ‘감각 워크숍’ 등을 진행했다.
민 연출은 “지윤씨가 사회생활 훈련도 잘돼있고 암기력도 탁월한데 추상적 단어를 어려워해서 작품 줄거리를 프린트해서 벽에 붙여 놓으니 지윤씨 뿐 아니라 다들 시각적 이해도가 높아졌다. 15년간 연출하면서 왜 이렇게 안 했을까 싶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눈빛 교환에 한달 걸렸지만, 대사 100% 와닿았죠"

배우 정수영(왼쪽)과 백지윤이 연극 연습 중 이마를 맞댔다. 정수영은 "'젤리피쉬'가 세상의 시선을 확장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배우 정수영(왼쪽)과 백지윤이 연극 연습 중 이마를 맞댔다. 정수영은 "'젤리피쉬'가 세상의 시선을 확장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찬찬히 눈을 맞추며 가까워지는 시간도 가졌다. 정수영은 “지윤은 본능적인 배우”라며 “한달 만에 눈동자를 마주쳤는데 정말 맑더라. 켈리 대사가 100% 다가와서 울컥했다”고 했다. 또 “어려운 대사나 섹스와 관련한 노골적인 장면을 어떻게 이해시킬지 고민했는데, 지윤이 잘 따라와 줬다”고 말했다.
민 연출은 “지윤씨가 실제 아플 때도 있지만 대사를 못 외워서 엄살을 피울 땐 솔직하게 지적했다. 처음엔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던 지윤씨도 먼저 동료한테 인사하고 감사를 표하는 쪽으로 바뀌더라”고 설명했다.
극중 켈리와 닐의 로맨스를 주연 배우 백지윤은 어떻게 느꼈을까. 두어번 교제 경험이 있다는 그는 “우리 가족은 (남자친구) 만나는 걸 반대하지 않는데 아그네스는 반대한다. 위험하니까”라면서도 주인공들이 천생연분인 이유를 차분히 설명했다. “닐은 잘생기고 켈리 말에 웃어주고 장난도 치고 잘 배려해줘요. 켈리는 닐보다 똑똑하고 완벽하고요.”
이어 동료 배우와 제작진 이름을 한명 씩 부르며 “대단하다. 행복하다”고 거듭 말했다.

민새롬 연출 "인간 취약성 정면돌파하는 작품" 

연극 '젤리피쉬' 작품개발 쇼케이스에서 켈리의 남자친구 닐 역할을 맡은 배우 김바다. 켈리의 유머감각과 솔직함에 끌린 닐은 막상 교제를 시작하자 주위에서 자신을 혐오하는 시선을 느끼고 당혹스러워 한다. 사진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연극 '젤리피쉬' 작품개발 쇼케이스에서 켈리의 남자친구 닐 역할을 맡은 배우 김바다. 켈리의 유머감각과 솔직함에 끌린 닐은 막상 교제를 시작하자 주위에서 자신을 혐오하는 시선을 느끼고 당혹스러워 한다. 사진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저신장 장애청년 도미닉 캐릭터는 원래 정신장애였지만, 한국판은 연극 '파우스트' '코리올라누스', 영화 '고속도로 가족' 등에 출연한 저신장 배우 김범진이 설정을 바꿔 캐스팅됐다. 공연을 기획‧공동제작한 석재원 프로듀서는 캐스팅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그는 “한 장애인 단체는 다운증후군에 대한 해석이 틀렸다고, 이렇게 부모에게 대들지 않는다고 항의하기도 했다”면서 “백지윤씨 어머니는 30대 딸이 공연을 통해서 더 폭넓게 체험하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돼서 좋았다며 적극 지지해주셨다”고 말했다.
민 연출은 “‘젤리피쉬’는 장애‧비장애 구분보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서로 다른 취약성을 들여다보게 하는 따뜻하고 매력있는 작품”이라면서 “극중 인물들이 그 취약성을 스스로 목도한 뒤 어떻게 정면돌파하는지 봐주시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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