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에 권총 쥐여준 90세 사진작가…갑자기 젊은층 몰린 사연

중앙일보

입력

사진작가 데이비드 헌(David Hurn)의 작품 일부. 그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이다. David Hurn Instagram

사진작가 데이비드 헌(David Hurn)의 작품 일부. 그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이다. David Hurn Instagram

"이름도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인스타인가 뭔가 하는 거 있잖소? 그걸 시작했더니 갑자기 젊은이들이 몰려와서 깜짝 놀랐다오."  

올해 7월로 만 90세를 맞는 거장 사진작가 데이비드 헌(David Hurn)이 BBC방송과 지난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BBC는 헌을 소개하며 "평범해 보이지만 비범한 예술가"라며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파고든 그야말로 거장"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헌은 젊은 시절 권위 있는 국제 보도 사진작가의 모임인 매그넘 소속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비틀즈부터 션 코너리, 오드리 헵번까지 20세기를 풍미한 스타들이 그의 피사체가 되기를 원했다. 그의 초기작 중 특히 유명한 작품은 션 코너리가 권총을 든 007 포스터다. BBC에 따르면 권총을 든 포즈는 헌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비틀스 역시 그에게 투어를 다니는 한 달간 그들의 일상을 밀착해 촬영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비틀스의 네 멤버가 기차 안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식사하는 사진 등이 그 결과물이다.

사진작가 데이비드 헌(David Hurn)의 인스타그램 계정. David Hurn Instagram

사진작가 데이비드 헌(David Hurn)의 인스타그램 계정. David Hurn Instagram

그의 시작은 미약했다. 영국 웨일스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수의사를 꿈꿨다고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난독증을 발견했고, 결국 군에 입대했다. 평범한 병영 생활을 하던 그는 어느 날 사진 잡지를 집어 들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터뜨렸다고 한다. 어느 러시아 장교가 자신의 부인에게 백화점에서 모자를 사주는 사진이었다고 한다.

왜 눈물이 나왔을까. 헌은 BBC에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며 "나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많이 사랑하셨는데, 함께 쇼핑을 가셔서 모자를 사주시던 행복했던 때의 부모님 미소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왜인지 그 사진을 보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고, 사람들이 보건 말건 엉엉 소리 내 울었다"고 했다. 사진의 힘을 깨달은 순간이다.

사진작가 데이비드 헌(David Hurn)이 촬영한 오드리 헵번.David Hurn Instagram

사진작가 데이비드 헌(David Hurn)이 촬영한 오드리 헵번.David Hurn Instagram

제대 후 그는 무작정 카메라를 한 대 사 들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사람과 사물을 찍었다고 한다. 그러다 마이클 풋이라는 인물을 만났는데, 훗날 정치인이 되지만 당시엔 기자였다고 한다. 헌의 사진을 본 풋은 그에게 "헝가리에 가서 현지 시위대 촬영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는 수락했고, 사진작가로서의 그의 인생이 열렸다.

사진작가 데이비드 헌(David Hurn)의 작품 일부. David Hurn Instagram

사진작가 데이비드 헌(David Hurn)의 작품 일부. David Hurn Instagram

그의 사진은 곧 라이프(LIFE) 지와 같은 권위지에 실리기 시작했으며, 그는 부와 명성을 쌓았다. 사진 수업 한 번 제대로 듣지 않았으나 유명 작가가 됐다. 셀럽들뿐 아니라, 사고 현장 르포 사진까지 그는 장르와 피사체를 가리지 않았다.

헌은 은퇴 후에도 촬영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비틀스나 배우 같은 셀럽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에서 가족사진 등을 봉사 개념으로 찍는다고 한다. 틈틈이 그의 옛날 사진을 정리하다, 소셜미디어 등에 저장과 같은 개념으로 올려두려고 시작한 게 붐이 됐다. 그는 BBC에 "중요한 건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라며 "난 내 삶에 감사하고 행운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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