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돌보는 11살…나홀로 고군분투 '영 케어러' 30만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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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호 13면

사각지대 놓인 가족돌봄청년

“힘들어도 어쩔 수 없죠.”

정우(11·가명)는 철이 일찍 들었다. 그래야만 했다. 할머니와 단둘이 생활하고 있는 정우는 할머니 간호부터 집안일에 생활비와 공과금 관리까지 도맡아 한다. 부모님은 정우가 태어난 지 석 달여 만에 이혼했다. 이후 엄마는 가출했고 아빠는 사업을 하다 1년여 전부터 연락이 두절됐다. 설상가상 여든이 다 되신 할머니는 중풍을 앓은 뒤 반신마비 증세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정우는 “집안일 챙기랴 할머니도 보살피랴 하루하루가 힘겹지만 할머니가 저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걸 아니까 버텨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어린이날에도 정우는 친구들이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학교에서 서로 무슨 선물 받았는지 얘기하는 거 들으면 부럽고 그래요.” 그래도 할머니를 원망하지는 않는단다. “몸이 불편한 게 할머니 잘못은 아니잖아요. 저라도 챙겨드려야죠.”

김소희(24·가명)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10여 년간 나이 드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홀로 돌보며 살아왔다. 김씨는 “또래 아이들과 확연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어려서부터 체감했다”며 “지금이야 지자체에서 돌봄비 등 일부 도움을 받지만 그땐 누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어려서부터 가족을 책임지다 보면 정서적 결핍 등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쉽다”며 “나 같은 아이들을 위해 정부나 지자체, 민간단체들이 심리 상담 등을 적극 지원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고 전했다.

정우나 김소희씨는 ‘가족돌봄청년’이다. 신체적·정신적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가족 구성원을 돌보며 ‘실질적 가장’ 역할을 맡고 있는 아동·청소년·청년을 아우르는 말이다. 외국에서는 일찍이 이들을 ‘영 케어러(young carer)’로 부르며 정부 차원에서 보호·지원 정책을 확대해 왔다. 반면 우리 사회의 가족돌봄청년들은 여전히 사회적 관심과 정책적 지원의 사각지대에서 나홀로 신음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족돌봄아동 지원법 국회서 ‘낮잠’

당장 공식 통계부터 잡혀 있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는 대략 18만 명 규모로 파악하고 있지만 민간단체들은 최소 30만 명 이상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정부 지원책도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초 가족돌봄청년 지원을 위한 첫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연 200만원의 ‘자기 돌봄비’를 지급하겠다고 밝혔지만 지원 대상이 960명에 불과해 대다수 가족돌봄청년이 실질적 지원을 체감하기엔 크게 부족한 상황이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정신적 고충 또한 금전적 어려움 못지않게 시급히 해결돼야 할 문제로 꼽힌다. 2022년 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가족돌봄청년의 주당 평균 돌봄 시간은 21.6시간에 평균 돌봄 기간도 46.1개월로 거의 4년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우울감 증세를 겪는 가족돌봄청년은 61.5%로 일반 청년(8.5%)보다 7배 이상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어린 나이에 늙고 병든 가족을 수년간 홀로 책임지다 보니 절반 이상이 우울감 등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 지원 대상에서 만 13세 미만은 제외돼 있는 것도 논란거리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지난해 가족돌봄청년 실태를 조사한 결과 10명 중 한 명은 만 13세 미만 초등학생인 것으로 나타났다. 재단 관계자는 “5년 넘게 가족을 돌보고 있다는 응답자 중 60% 이상이 중고등학생인 점을 감안할 때 초등학생 때부터 돌봄이란 짐을 떠맡고 있는 경우가 상당수”라고 진단했다.

이에 대해 복지부는 “만 13세 미만 아동은 지원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동 보호 차원에서 다른 방식의 지원책을 강구하겠다는 것”이란 입장이지만 부처별 정책 조율 과정에서 자칫 소외될 우려가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함선유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가족돌봄청년 중에서도 아직 초등학생에 불과한 만 13세 미만 아동을 챙기는 게 무엇보다 시급한 실정”이라며 “어느 부처가 어떤 정책을 내놓든 초등학생들을 돌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게 우선시돼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법적·제도적 정비도 현안 중 하나다. 국회에서도 지난해 가족돌봄아동·청소년·청년 지원법안 2개가 잇따라 발의됐다. 지원센터를 운영하는 등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 의무를 명시한 법안이다. 하지만 여전히 보건복지위 문턱을 넘지 못한 채 21대 국회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있다. 법안을 발의한 강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돌봄을 받아야 할 아동과 청소년들이 오히려 돌봄의 주체가 돼 있는 현실을 개선하려면 더 늦기 전에 법적 토대부터 갖춰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해외 사례를 적극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영국은 아동복지법에 영 케어러 발굴·지원 방식을 별도로 규정해 놓은 뒤 교육 훈련 프로그램과 긴급 지원 등에 적극 나서고 있다. 호주도 2010년 영 케어러 지원법을 만들고 1인당 연간 3000 호주 달러(약 270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채희옥 초록우산 아동옹호본부 팀장은 “정부 차원에서 가족돌봄청년을 직접 찾아내고 지원책도 꼼꼼히 챙기는 외국과 달리 일부 지자체의 경우 여전히 당사자인 어린아이들이 직접 신청해야만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며 “고령 인구가 갈수록 늘고 있는 가운데 이들을 돌봐야 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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